제로랩의 365일

제로랩의 365일

제로랩의 365일

꾸준함과 성실함. 디자인 스튜디오 제로랩이 지난 1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10년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시작한 프로젝트 ‘Stool365’의 상반기 전시에 다녀왔다.

 

무신사 테라스에서 진행한 ‘스툴 365’ 프로젝트의 상반기 작품. 올 연말에는 365개의 작품을 한데 모아 하반기 전시를 열 예정이다.

 

디자인 스튜디오 제로랩의 김동훈(왼쪽), 장태훈(오른쪽) 실장.

 

이렇게나 다양한 스툴이라니. 모양도 재료도 색상도 각양각색인 스툴로 가득 메운 공간에 눈길이 절로 갔다. 한눈에 봐도 하루이틀의 결과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장태훈, 김동훈 실장이 함께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제로랩의 작품이다. 2020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매일매일 SNS에 스툴을 공개하는 방식인 ‘스툴 365’는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제로랩이 지난 시간을 콘텐츠로 풀어낸 장기 프로젝트다. “처음 제로랩을 만들 때 우선 10년만 버텨보자는 것이 목표였어요.10년 동안 제로랩을 운영하고 유지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생각해봤어요. 대단히 감각적이거나 요즘 말로 힙해서라기보다는 보이는 듯 안 보이게 오랫동안 작업해왔고, 그런 꾸준함이 제로랩을 대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장태훈 실장이 프로젝트의 시작을 설명했다. 2010년 설립된 제로랩은 그간 전시 공간 디자인과 그래픽 작업, 다양한 그룹전에 참여하는 등 디자인과 제작을 함께 진행했다. “애초에 10년간 보여준 꾸준함과 성실함에 의미를 두고 프로젝트를 기획하다 보니 각각의 스툴에 너무 집중하지 않았어요. 사실 이번 상반기 전시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반년 치를 살펴봤는데, 역시 이렇게 묶여있을 때가 더 좋은 의미를 갖는 구나 싶었어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버리고 싶은 것도 있어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툴 하나 하나에 너무나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 프로젝트를 완료하는 데 중요한 지점이지 않을까요. 또 하나에만 집중하다 보면 생각과 고민도 많아져 매 순간 순간 힘든 작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장기간 이어지다 보니 1차적으로 저희가 흥미를 잃으면 안 되거든요.”

 

칸마다 번호를 매겨 전시했다.

 

이들은 평소 작업하지 못했거나 머릿속으로만 구상했던 것을 만들어가며 최대한 가벼운 마음으로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다. 머리를 꽁꽁 싸매는 순간 되레 스트레스가 될 수 있기에 정말 즐기는 듯 보였다. “저는 사실 엉덩이를 댈 수 있겠다 싶으면 오늘부터 넌 스툴이야(!) 하는 편이에요. 작업실에서 이것저것 재료를 대보면서 디자인을 구상하죠. 상황에 따라 30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을때는 그 시간 내에 만들어야하는 작은 도전이 되는 거죠.” 장태훈 실장이 설명했다. “저도 마찬가지겠지만 조금은 다른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는 형태의 다변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든 것 중에는 부실한 것도 많아요(웃음). 부서지더라도 어떻게 하면 동일하지 않은 형태를 만들 것인가에 포커스를 두고 있거든요. 그날에 따라 어떤 기능을 줄 것이며, 어떤 높이로 만들 것인지 그 두가지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하루에 7개를 만들 때도 있고요. 또 최대한 스타일링을 배제하기 때문에 조금 더 자유롭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죠.” 김동훈 실장이 말했다. 이들은 현재 200여개의 작업물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아카이브가 된 것 같다며, 새로운 이미지를 찾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스툴을 찬찬히 살펴볼 때도 있다고 한다. 무신사에서의 상반기 전시를 마친 제로랩은 다가오는 12월,365개의 스툴과 함께 완성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전했다. 후반기 전시 역시 딱딱한 미술관이 아닌 캐주얼한 공간에서 강연과 워크숍을 통해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연말에는 코로나19가 잠잠해져 보다 자유롭고 활동적인 전시로 찾아오길 기대해본다.

 

알록달록스툴,R스툴,포도스툴,해체 조립이 가능한 등받이 스툴 등 직관적이고 유쾌한 이름을 지닌 다양한 스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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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포토그래퍼

이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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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페이즈멍, 예측 대신 상상하는 기술

데페이즈멍, 예측 대신 상상하는 기술

데페이즈멍, 예측 대신 상상하는 기술

디지털 기술과 만난 데페이즈멍은 기존의 질서와 이성을 뛰어넘어 불가능한 현실을 꿈꾸고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팀랩 전시회, 상하이, 2019.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영화 속 사건 같다. 전염병과 홍수라니. 첨단의 2020년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헌데 마치 시간이 평행이동이라도 한 듯, 딱 100년 전 유럽이 이와 같았다. 기계 문명의 발전 덕분에 도시가 팽창하고 세계화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세계대전이라는 처절한 파괴를 경험했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얻게 된 깨달음은 ‘다다’와 ‘초현실주의’라는 유례없는 새로운 미술을 만들어냈다. 이성적인 논리로는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우연과 무의미의 예술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건 바로 ‘데페이즈멍Depaysement’이다.

 

KAWS, COMPANION, 2020, 홍콩, 2020 AR. KAWS and Acute Art

 

프랑스어 데페이즈멍은 본래의 자리(pays)에서 이탈(de-) 한다는 뜻인데, 시인 로트레아몽은 이를 ‘해부대 위의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즉 전혀 다른 문맥에서 연결될 수 없는 것들이 함께 있을 때 생기는 의아함, 기이함, 초현실적인 경험을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곡의 가사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같은 느낌이랄까. 의외의 결합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무의식을 해방시킴으로써 자유로운 창조성을 발현케 한다. 이성을 갈고닦은 끝에 만나게 된 것이 결국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최첨단 무기와 자국 중심주의의 전쟁 논리였으니, 그것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꿈과 상상으로 달려간 것이다. 마그리트는 바로 이 기법의 대표적인 작가로 정교하게 그린 사물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작은 머리빗을 방 안 가득 차게 크게 그리는가 하면, 낮과 밤을 바꾸는 식으로시간을 바꾸거나 혹은 사람을 공중에 띄우는 등 공간을 다르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데페이즈멍 기법은 1960년대 팝아트를 통해 다시 살아났다. 이번엔 초현실주의 시대와는 다른 배경에서였다. 줄을 서서 물자를 배급 받고 절약하며 살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대량생산 시대에 접어들자 상품을 산처럼 쌓아놓은 슈퍼마켓 시대를 맞이했고, 그동안 살아온 상식이 완전히 깨져버리는 경험은 68혁명을 통해 최고조에 이르렀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작은 사물을 크게 만들어서 이번에는 아예 야외에 공공 조각으로 세워놓은 클라스 올든버그나 신체나 사물의 일부만을 크게 확장해서 화려한 색으로 그린 톰 웨셀만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D’strict, 서울, 2020. d’strict, urdesignmag

 

Claes Oldenburg, Spitzhacke, 1982, Kassel, Germany.

 

요즘 다시 데페이즈멍이 부활하는 조짐이다. 특히나 디지털 미디어는 데페이즈멍을 보다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데 적극 활용되고 있다. 사방이 이미지로 둘러싸여 총체적인 착시 효과에 빠지게 만드는 야요이 쿠사마의 작은 방, 디지털 아트의 새로운 영역을 펼쳐가고 있는 팀랩, 반 고흐 등 명작 프로젝션을 활용한 미디어 전시회 등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AR 기법까지 등장하여 카우스, 올라푸르 엘리아슨, 버질 아블로 등 미술과 패션을 오가는 첨단의 크리에이터들이 관람객이 자신의 휴대폰 카메라를 이용해 작품을 구현할 수 있는 앱을 공개했다. 삼성역에 등장한 디스트릭트의 파도는 평면 전광판에 입체적인 효과를 구현해내 주목을 받았다. 기존의 질서와 이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데페이즈멍을 활용하며 유머와 일탈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애써왔다. 데페이즈멍이 이 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지금이 새로운 변화의 시기라는 징조는 아닐까? 수많은 미래학자들이 향방을 예측하고 있지만,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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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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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연의 예술가

홍연의 예술가

홍연의 예술가

실의 작가 시오타 치하루는 붉은 실오라기에 유한한 삶에 관한 사유를 남기기 시작했다.

 

 

가나아트센터의 2층 전시장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혈관을 연상시키는 붉은 실이 이리저리 뒤엉키며 공간 전체를 옭아매 마치 신체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자아낸다. 실을 활용한 작업으로 ‘거미여인’ 혹은 ‘실의 작가’로 불리는 시오타 치하루의 작품이 지난해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영혼의 떨림>에 이어 가나아트센터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녀는 교토 세이카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 함부르크 조형대학에 진학한 뒤, 브라운슈바이크 예술대학과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시오타 치하루의 대표 장르로 손꼽히는 퍼포먼스 아트는 당시 그녀의 스승이었던 러시아 출신의 퍼포먼스 작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레베카 호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랜 학업 과정을 거치며 페인팅이 가진 표현의 한계를 고민하던 그녀는 마치 회화에서 선을 그리는 것처럼 실을 활용한다면 단순히 면을 채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간을 예술 작품처럼 구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결과, 실을 주재료로 드로잉, 조각, 설치와 퍼포먼스까지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폭넓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녀의 노력은 2015년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극찬을 받으며 빛을 발했다.

 

한국에서 수집한 의자와 공간 전체를 붉은 실로 옭아맨 설치 작품 ‘우리들 사이’.

 

조각이나 설치 작품 외에 드로잉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언뜻 보기에는 차분히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듯하지만, 그녀의 삶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일로 갔던 그녀는 정착하기 시작한 2년 동안 아홉 번이나 거주지를 옮길 만큼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특히 두 번이나 찾아온 암 투병은 그녀로 하여금 인간의 실존과 관계, 나아가 죽음과 삶에 대해 탐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17년 암이 재발하자 그녀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투병 과정을 투영해 부드러운 가죽을 칼로 도려낸 후 천장에 걸어 축 늘어진 피부를 표현한 ‘Out of My Body’를 발표했다. 혈관이나 머리카락, 피부 등 신체의 일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그녀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불안정했던 시기에 완성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가나아트센터와 가나아트 나인원에서 동시에 개최된 이번 전시명이자 그녀를 대표하는 설치 작품인 ‘우리들 사이Between Us’에서도 시오타 치하루만의 도드라진 작품 세계를 접할 수 있다. 300m²에 이르는 공간에서 총 12일간 작업을 진행했는데,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다양한 의자를 수집한 뒤 각각의 의자를 붉은 실로 연결했고, 나아가 전시장을 붉은 실로 옭아매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관객들이 실로 구현된 모든 형태의 관계와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언택트 시대를 맞이해 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방식과 정의가 도출되는 요즘, 그녀의 작품은 급격히 찾아온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과 타인과의 접점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는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붉은 실을 주재료로 한 조형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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