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피티에 뿌리를 둔 아티스트 제이슨 리복. 그는 파인 아트의 예술 세계에서도 자신만의 정체성과 예술에 대한 순수한 흥미를 잃지 않고 무한 루프의 인생을 그려내고 있다.
스프레이로 벽면을 가득 그려놓은 예술적인 낙서를 보면 어느 유명 갤러리가 부럽지 않다. 심지어 심오한 메시지와 의미까지 담겨 있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스트리트 아트와 그래피티를 금기시한 예전과 달리 언제부턴가 예술로 인정받으며 현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기까지 한다. 이는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예술에 대한 편견을 깨고 다양성과 사회 참여적인 목소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 대중들이 거부하기보다 공감과 이해로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스트리트 아트가 대중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도 흔치 않다. 오는 9월 9일부터 지갤러리 g.gallery에서 미국의 그래피티아트를 주도해온 제이슨 리복 Jason Revok의 <All Things Must Pass> 개인전을선보인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국내에서 처음 전시를 진행하는 제이슨 리복은1977년생의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그래피티 라이팅을 시작해 이를 파인 아트로 승화시킨 보기 드문 아티스트다. 그는 전통적인 아트 작업 방식이나 전시 공간의 경계를 허물며 컨템포러리 파인 아트를 선보이는 LSC 갤러리의 소속 작가이기도 하다.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킨 그에게 그래피티와 작품 세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래피티에 뿌리를 둔 파인 아트 작가라니 정말 신선하다. 그래피티와 파인 아트의 경계를 어떻게 허물었는지 궁금하다.
지난 30년간 그래피티 작업을 해오다2009년부터 회화 작업으로 옮겨왔다. 그 당시 그래피티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새로운 재료와 도구를 사용한 작업을 하고 싶었다. 틀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도화지와 공간이 절실했다. 그래서 길거리가 아닌 나만의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고 싶었다. 물론 나의 뿌리인 그래피티를 부정하거나 지우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길거리가 아닌 작업실로 옮겨와 작품을 그려냈다. 이런 변화가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여전히 흥분된다.
10대부터 그래피티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래피티의 어떤 매력이 당신을 지금까지 이끌었나?
13살 때부터 그래피티 라이팅을 시작했다. 그래피티 라이팅이란 단어들을 그래피티 기법으로 그려내는 행위를 말한다. 그 당시 내게 그래피티는 신비로웠고 또 다른 나를 창조할 수 있는 세계였다. 사실 그래피티는 ‘나쁜 것’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이런 이유로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에 순식간에 작품을 탄생시킨다. 그걸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저런걸 그릴 수 있지하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래피티는 인종과 계급을 초월하는 장르다. 나 자신이 창작자로서의 소유권을 가진 분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꽤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상대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피티의 세계에서는 외모나 배경 같은 특정한 범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창조하는 예술과 행동 그리고 열정을 보고 판단한다.
어떤 작품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렸고, 또 다른 작품은 질감이 풍부한 천도 보인다. 재료의 다양성이 흥미롭다.
내가 사용하는 재료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스튜디오에서 공업용 페인트 분사기를 사용하는데 이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그래피티를 지우는 데 쓰였던 도구이기도 하다. 한때 나의 작업물을 없애는 데 사용했던 도구를 지금은 캔버스로 가져와 사용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물론 스프레이 캔도 사용한다. 작업의 기본 단위가 되는 마치 연필 5같은 재료이다. 또 스튜디오 작업을 시작하면서 나만의 도구도 만들었다. 스프레이 캔을 거대한 기어 속에 넣은 상태로 복잡한 기하학적 모양을 변화시키며 그려나가는 스피로그래프 Spirograph 작업을 한다. 반복적인 패턴이 기계적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패턴을 만들어낸다. 스피로그래프가 만들어내는 패턴의 완벽한 대칭과 대조되는 그 긴장감이 좋다.
작품에 스며 있는 일정한 패턴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 자신과 다시 연결되는 출발점이라는 개념으로 무한 루프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패턴에 어떤 일종의 진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광범위한 사물에 대해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재 역시 반복적인 투쟁의 패턴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를 추상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패턴은 현재 우리 삶의 방식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을 통해 디트로이트 도시 개발은 물론 비영리 단체와 청소년을 위해 봉사와 기부를 하고 있으며, 디트로이트에 스튜디오도 있다.
디트로이트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나?
작가로 활동하는 초기에 나는 디트로이트에서 살았고, 이곳은 내게 진정한 탐험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 LA에살 때 자선단체에 기부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은 이미 기부가 보편화되어 기부금이 많이 모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기부 문화가 덜한 디트로이트 자선단체에 기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디트로이트에서 자선 활동을 하면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디트로이트는 다른 지역에 비해 작가들이 훨씬 더 넓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또 생활비가 저렴해 부담감이 덜하기 때문에 작업에 집중할 수 있다. 작업실이 크다 보면 실험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도 많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그래피티가 예술로 인정받고 있지만 여전히 제한적인 부분이 있다. 그런 선입견과 편견을 깨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피티를 하다 파인 아트로 전향하는 작가는 많다. 하지만 그래피티에서 보인 열정을 회화 작업까지 끌고 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이 회화와 스트리트 아트 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데 큰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그래피티는 내가 자연스럽게 그림을 배우고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현재의 작업에서도 그 뿌리를 지키고자 한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인데, 나의 뿌리를 버리고 전혀새로운작업을한다는것은나의작품이될수없다.그래피티활동을할때쓰던 ‘리복 Revok’이라는 이름을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는가?
작품을 구상하지 않는 시간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딸과 아내 그리고 강아지는 작품 활동만큼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내 작품의 1호 팬이자 나의 1호 팬이니까.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사실 나는 전혀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계획 없이 작품을 그려내는 것은 아니다. 작품 활동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노력하고 성실한데 지금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실험정신을 발휘하며 끊임없이 집중할 것이다. 덕분에 지갤러리와 연이 닿아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