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의 본질을 이해하고 왜곡하지 않는다. 기능적인 조각과 미학적인 가구의 경계에 선 박원민 작가는 단 하나의 문법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빛을 한껏 머금을 땐 쪽빛을 내다가도 이내 녹색의 제 색으로 바꾼다. 불투명한 면 사이를 비집고 투과한 빛이 각기 다른 채도로 수장고의 바닥을 적셨다. 큼직한 프레임을 가득 채운 정물과 허리 즈음까지 오는 조형이 가득한 이곳에서도 이질감이 없다만, 분명한 가구다. 박원민 작가의 레진 스툴의 첫인상이었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를 졸업한 다음 해인 2013년, 밀라노에서 열린 디자인 위크에서 화려한 시작을 알린 그는 로사나 오를란디와 함께 바가티 발세티 미술관 전시 등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꾸준히 이름을 알렸다. 이후 그는 마르텐 바스 Maarten Bass, 나초 카르보넬 Nacho Carbonell, 캄파나 형제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유한 카펜터스 워크숍 갤러리 최초의 한국 작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두 차례의 개인전을 열며 공고한 작품 세계를 다져온 그를 서울의 한 수장고에서 마주했다.
카펜터스 워크숍 갤러리와 함께한 첫 개인전 <Haze : 희미한 연작>을 통해 작은 스툴에서부터 큰 볼륨의 테이블까지 다양한 레진 가구를 선보였다.
헤이즈 시리즈는 처음으로 독립 디자이너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준 전시다. 전시를 구상하면서 마치 안개가 내려앉은 듯 고요하고 흐릿한 인상을 구체화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안개를 뜻하는 헤이즈Haze와 어지러운을 의미하는 디지 Dizzy를 떠올렸는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흐려지는 기억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와도 연결짓고자 했다. 영어와 한국어를 조합해 제목을 지은 것도 이 같은 의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시인이 내뱉는 은유적인 언어처럼 가구를 통해 시각적으로 이런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다. 물론 첫 독립 전시였던 만큼 나의 아이덴티티를 발현하는 것 또한 중요했다. 색 표현과 형태의 변형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볼 때 레진은 가구를 제작하는 데 있어 아주 매력적인 요소였다.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나?
종이처럼 약하거나 혹은 강도나 지지력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소재를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디자이너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무언가가 내게는 필요했다. 좋은 디자인이란 훌륭한 재료의 뛰어난 특성을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최대한 구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구태여 재료의 특징이나 컨셉트, 디자이너의 의도를 말하지 않아도 사용하면서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레진은 그런 면에서 최적화된 재료다. 레진은 캐스팅 Casting이라는 제작 과정을 통해 투명도와 대비 등의 디테일을 조정할 수 있다. 또한 액체에서 고체로 굳히는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형태를 변형할 수 있으며, 투과하는 빛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마치 수채화의 채도를 조절하듯 다채로운 색과 인상을 주는 가구를 만들 수 있다. 이음새와 결합 부분을 드러내 중첩되는 부분의 색이 겹치도록 보이게하는 것 또한 그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두 번째 개인전 <Plain Cuts>에서는 금속과 알루미늄을 활용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전의 레진과 전혀 다른 소재를 선택한 점이 재밌다. 혹시 두 소재간의 연관성이라도 발견한 것인가?
오히려 극명한 차이를 발견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Plain Cuts> 시리즈는 알루미늄을 활용한 작업물이다. 알루미늄은 부식의 정도나 화학작용에 의한 변색, 용접이라는 행위로 이뤄지는 인위적인 형태의 변형 등 변수가 많은 소재다. 디테일을 다양하게 조정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색을 낼 수 있는 레진과 달리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이는 레진 작업을 통해 느꼈던 한계점 중 하나다. 나는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작품에 담고 싶었다. 알루미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혹은 화학적 힘에 의한 변수를 무시할 수 없다. 또, 다른 재료에 비해 가볍고 얇더라도 뛰어난 지지력과 강도를 자랑한다는 점도 알루미늄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이를 최대한 활용해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미학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 ‘Haze’ 시리즈였다면, ‘Plain Cuts’는 잘 짜여진 구조에서 엿볼 수 있는 탄탄한 균형과 안정감을 보여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선과 면의 인상을 최대한 활용해 건축적인 느낌을 극대화한 가구라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다. 결국 디자이너는 본인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지 않나. 논리적이고 잘 짜여진 구조 속에서 드러나는 형식적인 미학은 ‘Plain Cuts’ 시리즈로 선보인 선반에서 유독 잘 나타난다. 여덟 개로 나누어진 선반 위에 흰 선으로 그려진 사각형이 부유하는 듯한 형태를 지녔는데, 개인적으로도 흡족해하는 작업물이다. 아, 검은색 겉면은 페인트가 아니라 부식의 결과물이다. 덕분에 알루미늄이 아니면 만들어내기 힘든 질감까지 표현할 수 있었다.
작업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매번 새로운 작업을 진행하기 전 최대한 많은 재료를 다루어보려 한다. 소재에 대한 탐구는 그만 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기술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각각의 소재가 가진 특성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 비로소 나의 상상력을 결합해 어떤 가구를 만들어낼 것인지 그려본다. 에너지 소모도 많지만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그리고 가구를 세상에 내보이며 하나둘 나의 아카이브를 만든다. 결국 ‘Haze’ 시리즈는 레진이라는 소재에 관해, ‘Plain Cuts’는 금속에 대한 나의 작업 과정이 결실을 맺은 논문과도 같은 것이다.
재료에 대한 탐구가 곧 작품을 만드는 영감이 되는 셈인가?
모든 자연물에게서 영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본디 모든 재료는 자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지금은 영감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재료가 지닌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려는 작업을 진행하는 데 초점을 기울이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선보인 스톤&스틸 로 테이블이 좋은 예일 것이다. 돌의 단면을 잘라 나온 울퉁불퉁한 곡선은 바람에 깎이고 바위끼리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자연에서 파생된 산물이다. 이런 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디자이너로서의 개입은 최소화하되, 자연의 흔적을 보존할 수 있는 기술과 부가 재료를 선별하는 등 나만의 정체성을 녹일 수 있을 정도만 노력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디자이너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나?
음악으로 비유해볼까. 디자이너는 악단의 지휘자 같은 존재다. 각 악기의 특질적인 점을 해치지 않고 이를 조화롭게 풀어내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실제 연주를 봐도 그렇지 않나. 어떤 지휘자가 수많은 악기와 연주자가 있는 오케스트라 앞에 서서 어떤 손짓과 표정을 내는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른 곡이 완성된다. 나는 작품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서 재료가 가진 본래의 인상과 특성이 망가지지 않고 오롯이 발현되기를 원한다. 그러니 깎고 다듬기보다 재료의 특징적인 면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보조적인 장치를 더하고, 그것이 함께 어우러져 완성품이 될 수 있도록 이끌고 싶다.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만드는 작업으로도 보인다.
가구는 사용성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는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요소다. 심미적인 요소를 강화하더라도 생활에 자연스레 묻어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한켠에 이고 산다. 오래 사용할 수 있는지 고려하고,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칫 기능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가구가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등한시할 수 있는데, 그건 또 싫다. 실용성과 심미성의 간극을 오가며 그것의 균형점을 찾는 것. 그 긴 시간의 과정을 나는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다른 작가 혹은 스튜디오와 함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은 없나?
2016년 살로네 델 모빌레에서 월페이퍼 매거진의 주관 아래 대리석 회사인 테스티Testi와의 협업 제의를 받았다. 호텔 리셉션 데스크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2톤짜리 돌을 활용하는 작업이었는데, 내게 호텔 데스크는 사무적인 공간이라기보다 수많은 고객을 응대하는 수천가지 대화의 장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자칫 딱딱해 보일 수 있는 직선 대신 곡선을 활용해 부드러운 느낌을 주되, 2톤이라는 무게감으로 공간의 중심을 잡는 가구를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껏 진행한 작품 중 가장 크고 무거운 재료를 활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작업을 선보일 계획은 없나?
내년 5월, 서울 삼청동에 오픈을 앞둔 서울 공예 박물관 리셉션 공간에 쓰일 안내 데스크를 제작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인 작업이 들어가지는 않은 상황이다. 이번 작품 역시 돌을 활용했다.
작업 이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가?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에서 건축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언젠가 건축물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지금, 열정이 가득할 때 해야하지 않겠나? 사실 6시부터 수업이지만, 간만에 한국에 들어온 만큼 어제는 과감히 수업을 포기하고 놀았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