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의 빛을 뿜는 책들이 비현실적인 환상을 만들어낸다. 책을 본뜬 모형 속 LED를 장착한 라이팅 북을 통해 강애란 작가가 구현해낸 것이다. 책을 주소재로 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는 그는 페인팅과 설치작품은 물론,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미디어 아트로까지 분야를 넓혀온 적극적인 아티스트다.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강애란 작가의 작품은 존재만큼이나 내포한 이야기의 가치를 중시한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젠더 갈등처럼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갈등의 최전선에 놓인 담론까지 좌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기만의 방 A Room of Her Own>, <숙고의 서재 Room for Reflection> 등의 개인전은 물론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강애란 작가를 어느 오후, 그의 작품이 비치된 더북컴퍼니의 로비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함께 이곳에서 약 1년 동안 진행될 전시 <변화의 서재 The Bookshelf Enlightened>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더북컴퍼니 3층 로비가 한층 밝아졌다. 회사의 얼굴 같은 이곳에서 확연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라이팅 북 덕분일 테다.
더북컴퍼니의 실내 인테리어를 담당한 김계연 대표와는 친분이 있었다. 가로수길에 그분의 쇼룸 겸 회사가 위치하던 시절, 지나가다 그곳의 내부를 보게 됐다. 쇼룸 한 켠에 놓인 책장이 너무 예뻤다. 그래서 거기에 내 작품을 놓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우리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에 내 작품을 전시하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이곳을 봤는데, 세련된 내부와 너른 공간에서 큰 존재감을 책장이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좋은 공간에 작품이 놓이는 건 언제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더북컴퍼니에서 발행되는 매거진을 모티프로 한 라이팅 북을 만들었다. 매거진으로 작품을 만든 것은 처음인가?
전시에 따라 작품의 방향을 맞추는 편인데, 문학과 관련된 전시라면 문학, 젠더적인 담론이 오간다면 여성학 서적 등을 활용해 라이팅 북을 만드는 편이다. 아트 북을 활용해 만들기도 한다. 이번 작업은 더북컴퍼니에서 발행하는 <메종> <마리끌레르> <싱글즈> <뷰티쁠> <주부생활> 등의 매거진 커버를 활용했는데, 너무 좋은 이미지가 많다 보니 선정하기가 쉽지 않았다(웃음).
작년, 갤러리 시몬에서 개최한 개인전 <숙고의 서재>에 관한 짧은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역사적 흐름을 여성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고찰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당시 선보였던 라이팅 북 역시 페미니즘을 다룬 문학과 철학 서적 등을 활용한 작품이었다.
꾸준히 여성의 삶을 조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재직 중인 이화여대의 한국여성연구원장을 역임하면서 젠더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이번 전시 이전에 아르코 미술관에서도 흡사한 주제로 전시를 가졌던 적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집필한 동명의 책 제목을 차용한 전시다. 방이라는 소재로 총 다섯 곳의 공간을 나누었는데, 나혜석, 김일엽, 최승희, 윤심덕 등 일명 신여성이라 부르는 개화기 엘리트 여성들을 대입한 방 네 개와 함께 전쟁이라는 참혹한 환경에서 성적 착취를 강요당했던 위안부의 방으로 구성했다. 다섯 개의 방을 차지한 여성들은 모두 식민지 조선의 여인이다. 억압적인 시대적 상황에서 전면으로 투쟁하며 주체적인 삶과 신념을 지키려 했던 신여성과 끊임없는 핍박과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은 같은 시대적 흐름에 놓여 있었다. 모두 대한민국의 여성사적인 흐름에서 좌시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사건이자 인물들로 한국사를 관통하는 이분들의 삶을 조망하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숙고의 서재>에서도 이분들의 삶을 다뤘는데, 우리가 결코 잊어서도, 곡해해서도, 좌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 않나. 이 문제에 대해 언제나 답보 상태인 채로 머무를 수는 없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깨우고자 한다.
책 작업 이전에는 보자기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인 걸로 알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따리다. 하늘에 대고 손으로 선을 그리면 그만큼이 제 것인 양 여겨지듯 나는 보따리가 생각을 담는 주머니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색을 입혀 때로는 환희와 기쁨 혹은 좌절과 불행에 대해 논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내 죽음과 같은 관념적인 담론에 대해서도 다루게 되다 보니 보따리가 점점 커지더라(웃음). 그런데 문득 책이라는 소재도 보따리와 생각을 담는 매체와 다름없이 느껴졌다. 결국 전하고자 하는 본질은 동일했던 것이다. 그래서 둘을 함께 활용하고자 투명한 수지 같은 레진을 활용해서 책을 싼 보따리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폭신폭신한 종이를 캐스팅하거나 딱딱한 알루미늄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점점 책을 소재로 한 작품을 주로 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 책이 기술을 만나 라이팅 북을 만나게 됐다.
보따리 작업에서도 라이팅을 넣어보는 것은 종종 시도했던 작업이다. 처음에는 작은 벌브 전구 등을 활용하다가 EL이라는 무기화합물 발광 장치를 거쳐 LED 조명을 사용하게 됐다. 라이팅 북의 커버 부분은 아크릴 판으로 만들고 책 등은 플라스틱을 깎아 제작했다. 책이다 보니 페이지를 구현해야 했는데, 처음에는 수작업으로 진행했더니 여간 힘든 게 아니더라. 다행히 요즘에는 기술이 좋아졌다. CNC 기술을 활용하면 정교한 작업이 가능해져 아크릴 같은 소재를 자르는 건 물론, 자잘하게 모인 페이지 표현 또한 구현할 수 있더라. 덕분에 빛 표현은 물론 더욱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왔다. 보자기에서 책 그리고 라이팅 북까지 20년에 걸쳐 차근차근 걸어온 것 같다. 나아가 페인팅에 LED를 접목하는 작품이나 인터랙티브 아트 분야를 접목한 작품도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혹자는 책과 같은 출판물을 구시대의 매체라 단정짓기도 한다. 뉴미디어 시대에서 책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창 디지털 매체가 부상하던 즈음, 나도 이러다 책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다. 화집이나 도록 출판의 비중도 눈에 띄게 줄었으니까. 그렇지만 다시 바뀌는 순간이 오더라. 한 통의 메일로 보내는 화집이나 도록보다 종이로 구성된 실물의 가치가 더 소중하다는 걸 이미 겪어본 사람은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내 손에 쥘 수 있는 실물의 가치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주는 무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존재 자체로 자산이고 책이 지닌 형태 자체도 내게는 너무 소중하다. 테크니션과 논의하며 계속 충전하지 않아도 빛을 발하는 라이팅 북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나아가 책의 내용을 직접 흡수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고안한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그것 또한 이러한 마음에서 기인했다.
지금도 제주에서 또 다른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다.
제주에 있는 포도 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전시에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숙고의 방’이라 이름 붙인 이 작품은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로자 파크스 등 널리 알려진 위인과 수많은 전쟁과 혐오 속에서 투쟁하며 자유와 평화를 쟁취하고자 한 이름 없는 의인들을 조명하는 데 목적을 뒀다. 그들의 업적이 나의 작품처럼 환하게 빛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