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서양식은 대개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양식 좀 한다는 레스토랑에서는 장시간 소스를 조리고, 콩피를 하고, 브레이징 을 하고, 정교하게 플레이팅을 했다. 완성된 요리는 아름다운 커틀러리로 우아하게 썰어 와인과 곁들였다. 우리가 양식하면 흔히 떠올리는 전형적인 그림의 한 장면이다. 프렌치 퀴진은 그 자체로 완벽했기에, 수세기간 축적해온 방식을 깨트려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뭐랄까. 약간 고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좀 더 새로운 것은 없을까? 그렇게 전세계 푸디들이 새로운 맛을 찾아 헤매일 때, 덴마크의 르네 레드제피 셰프가 노르딕 퀴진이란 것을 들고 나왔다. 자연 식재료의 순수한 맛을 조리법, 플레이팅에 그대로 적용하며 전세계 미식 씬의 판을 뒤엎었다. 요즘, 셰프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다양한 스타일의 요리를 보다보면, 자연스레 시선이 가는 것은 노르딕 스타일의 플레이팅이다. 그 모습이 심플하면서도 명료하며, 강렬하기 때문이다. 노르딕 퀴진을 대표하는 를레 Relae, 게이스트 Geist의 요리를 통해 노르딕 퀴진의 얼굴을 잠시 감상해보자.
를레 Ralae 노마의 수셰프였던 크리스티앙 푸글리시Christian Puglisi가 운영하는 곳. 내추럴 와인 전문바인 맨프레드 Manfred, 베이커리와 피자를 전문으로 하는 미라벨 Mirabelle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게이스트 Geist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으로 승승장구하던 파우스티앙 Paustian을 과감히 접고 시작한 것이 바로 게이스트다. 게이스트는 단품 메뉴만 다루는 캐주얼한 레스토랑으로, 심플하면서도 분명한 맛을 전달하며 노르딕 퀴진의 스타일을 잘 드러내고 있다. 참고로 게이스트의 보 베크 Bo Bech 셰프는 대학 졸업 후 자동차 세일즈맨을 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1988년 파리지엔 프랑수아 파스키에가 지인들과 함께한 파티에서 시작되었다. 미식과 패션, 엔터테인먼트를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으며, 30년이 지난 지금 파리와 뉴욕, 런던, 도쿄, 홍콩 등 70개 주요 도시에서 개최되고 있다. 디네앙블랑은 철저한 규칙을 지킨다. 일단, 개최 직전까지 행사 장소를 공개하지 않으며, 프랑스 궁정문화를 재현하는 흰색 의상을 입어야 한다. 음식도 프렌치 코스로 먹고, 파티에 필요한 테이블, 의자, 테이블웨어도 모두 직접 준비한다. 작년 서울에서 성황리에 개최된 후 서울은 5월 27일, 부산은 8월 26일에 진행될 예정이다. 음식은 레스쁘아의 임기학 셰프, 제로컴플렉스의 이충후 셰프가 협업으로 선보이며, 디네 앙 코스(9만원), 디네 두 가지 코스(7만원)가 있다. 참가비는 1인당 5만5천원으로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매 가능하다. web seoul.dinerenblanc.com · busan.dinerenblanc.com
아우어다이닝, 가드너 아드리아, 멜팅샵…요즘 핫하다는 레스토랑을 휙휙 지나쳐 걸었다. 그렇게 도산공원 끝자락에 다다랐을 무렵, 모퉁이에 이제 막 문을 연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가 있었다. 화려한 도산공원에서 장식을 모두 덜어낸 겸허한 모습으로. 그것은 마치 ‘오래 살아남는 공간’을 목표로 하겠다는 무언의 다짐처럼 보이기도 했다.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시작으로 현대카드는 몇 년간 꾸준히 감각적인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트래블, 뮤직에 이은 그 마지막 종지부가 바로 쿠킹 라이브러리다. “(라이브러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이죠. (하지만) 쿠킹 라이브러리는 책에만 갇혀 있지는 않습니다. 그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는,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을 목표로 합니다.” 공간을 둘러보기 전이었음에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1층
로버트 헤더, 1882 Ltd 등의 조리도구를 구매할 수 있는 입구를 시작으로 라이브러리에 들어섰다. 파스타 등의 식재료를 모아놓은 델리 섹션을 살살 걸으며 구경하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라이브러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지하 1층부터 4층으로 구성된 공간은 교차하며 맞물려있었다. 햇살과 음식 만드는 소리, 냄새가 자연스레 어우러져 녹아들 수 있도록 의도해서 설계했다고. 얼기설기 복잡한 것이 자칫 깜빡하면 길을 잃을 것처럼 보였다. 마치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갔을 때처럼. 그 아련한 추억처럼 말이다.
인그레디언트 하우스와 1만여권의 요리 관련 책으로 구성된 2층.
셀프 쿠킹을 체험할 수 있는 3층의 키친.
2~3층
무심코 들어갔지만 쉽사리 나올 수 없었다.’ 라이브러리를 채운 요리 관련 책은 자그마치 1만여권.제임스 비어드 파운데이션 북 어워드’와 ‘IACP 쿡북 어워드’의 수상작 전권 등 눈이 휘둥그레지는 콜렉션이 빼곡했다. 음식 전문가들이 직접 큐레이팅한 책은 크게 지역, 식재료, 조리방법을 기준으로 분리되었으며 홈쿠킹과 스페셜 다이어트, 드링크&베이킹 등 별도의 특별 섹션도 마련되어 있었다. 특히나 흥미로운 공간은 2층 중앙에 위치한 인그레디언트 하우스 Ingredient House다. 총 190여종에 이르는 향신료와 허브, 소금, 오일 등이 작고 예쁜 유리병에 담겨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직접 열어서 향을 맡고, 몇몇 향신료는 직접 맛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갈랑갈과 타마린드를 작은 볼에 덜어 핥아 보았다. 순간, 동남아의 뜨거운 열기가 향을 타고 훅 올라오는 것 같았다.
3층에는 책 속의 레시피를 직접 구현해 볼 수 있는 셀프 쿠킹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책 속 레시피에 있는 식재료로 구성된 키트를 받아들고, 현대카드 스타일의 아름다운 주방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맛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에디터는 애나 바네트의 <잇 더 위크> 78페이지의 버터밀크 치킨 타코를 만들어 보았다. 튀김 기름에서 검은 연기가 펄펄 끓고, 적양배추는 엉성하게 썰렸지만, 책 속의 레시피를 바로 구현해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곧 쿠킹 클래스도 오픈하고, 실외 테라스의 미니 텃밭에서 딴 채소를 요리에 직접 써볼 수도 있다는 소식!
4층
4층에 올라가니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레스토랑 ‘그린하우스’가 나왔다. 날이 좋으면 좋은데로, 비가 오면 오는데로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점심과 저녁, 각기 단 한 팀만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100% 예약제다. 아직 오픈 전이지만, 이곳에서의 식사가 분명 근사할 것이라는 것은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는 음식을 미각과 후각, 시각, 청각, 촉각의 오감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다. 먹방, 쿡방이 유행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음식에 쏠려 있다지만, 이렇게 유행을 취향으로 만들어주는 공간이 생겨서 기쁘다. 참새가 방앗간으로 날아들 듯, 부지런히 쿠킹 라이브러리에 다니다보면 음식의 세계는 더욱 넓고 깊어질 것이다. 쿠킹 라이브러리의 자세한 얼굴이 궁금하다면, 아래의 영상을 감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