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정갈하고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한 집을 만났다. 오랫동안 기대고 싶은 작고 하얀 집 ‘빙고 하우스’다.
ㄷ자 형태의 다세대주택 중 일부를 개조한 빙고 하우스.
이태원동의 가파른 언덕길을 숨을 고르며 올라가서야 하얀색 외관의 ‘빙고 하우스’를 만날 수 있었다. 빙고 하우스는 이 집의 주인이자 가장인 박경식 씨가 지은 이름이다. 빙고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가장 먼저 게임을 떠올리겠지만 이 집은 ‘기댈 빙 憑’, ‘오래되다 고 古’의 한자 뜻을 지니고 있다. 오랫동안 기대어 쉬고 싶은 마음을 담아 ‘빙고’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네 식구가 기대며 살아갈 이 집은 원래 열 세대가 살고 있는 다세대주택의 일부다. “ㄷ자 형태의 다세대주택 중 한 집이었어요. 몇 년 전에 집을 사두고 외국으로 나가게 돼서 그동안 세입자들이 살았죠. 그러다 아파트 생활을 접고 이 집을 개조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안주인인 육수경 씨는 강남 중심가에 살던 전형적인 도시 엄마였다. “제가 빌딩과 도시 느낌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도시녀예요. 이렇게 단독주택에서 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잘 아는 시공업체 사장님에게 집을 고쳤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푸념처럼 했더니 NBDC(노르딕브로스 디자인 커뮤니티)의 신용환 실장님을 소개해주더군요. 그전에도 몇 군데 인테리어 업체를 알아봤지만, 영 마음이 가지 않던 차였죠.” 부부는 신용환 실장에게 세 번의 꼼꼼한 미팅을 거친 후 집을 맡겼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남매의 방과 부부 침실을 마주한다.
“특히 집을 설계할 때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합이 맞아야 하죠. 여기 집주인분과는 느낌이 통했어요. 오래된 다세대주택이어서 골조만 남기고 다 부수고 새로 지어야 했지만 간만에 재미있는 작업이 되겠다 싶었어요.” NBDC 신용환 실장은 오랜만에 주거 설계를 하며 즐거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낡은 주택의 내부 구조를 완전히 새롭게 바꿨다. 계단 위치와 방의 구조 등 네 식구에 맞게 내부를 새롭게 설계했는데, 좁지만 있을 건 다 있고 수납도 알차게 마무리되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요소가 있어요. 남매의 방은 침대와 수납장만 있어서 단출함의 진수를 보여줬고, 거실 겸 다이닝 공간도 꼭 필요한 식탁과 싱크대, 냉장고만 뒀죠. 고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라면 아이들 방이 너무 단순해 깜짝 놀랄 거예요. 설계를 하며 이 가족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했고 그래서 전형적인 주거 구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아무리 깔끔하고 단출한 것을 좋아할지라도 생활하면서 생겨나는 각종 짐과 잡동사니 등은 피할 수 없을 터. 주부의 이런 고민거리를 신용환 실장은 수납공간으로 해결했다. “1층과 2층은 13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에요. 집이 좁은 대신 짐을 수납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을 곳곳에 만들었죠. 주방 하부장도 전부 수납공간이고 세탁실에도 칸칸이 수납장을 짜 넣었어요. 사실 이 집을 설계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세탁실 때문이죠.” 신용환 실장은 유리 천장으로부터 내려오는 햇살과 다른 공간과 분리되면서 널찍하게 활용할 수 있는 세탁실 공간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 단차가 있는 세탁실에는 주인공인 세탁기를 두었고 작은 화장실과 재활용품을 분리할 수 있는 공간도 갖췄다. 말 그대로 진짜 다용도실인 셈이다. 대부분의 다용도실은 춥고 그늘지기 마련이지만 이 집에서만큼은 세탁실이 버젓한 방처럼 존재한다. 자연스럽게 실내처럼 오갈 수 있으며 가족들의 옷과 세탁 도구 등을 깔끔하게 수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수납장을 갖춘 1층의 중요한 공간이다. 지하 공간의 구조 또한 재미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중 한 개를 가로로 연장해 지하실의 책상을 만든 독특한 구조다. 넓이는 2평이 조금 넘는 작은 공간이지만 혼자 책을 보거나 업무를 볼 수 있는 다락방같이 아늑하다.
큰 방 중간에 가벽을 세워 남매의 방으로 분리했다. 침대 외의 가구는 붙박이장 형태의 수납장이 전부다.
2층으로 올라가니 먼저 바닥재가 눈에 띄었다. 부부 침실과 붙어 있는 샤워실 겸 화장실 바닥에도 깔려 있는 바닥재라 방수 성능이 궁금했다. “바닥재는 스웨덴의 볼론이란 회사 제품이에요. 비닐 직조 바닥재인데 청소가 간편하고 어느 정도 생활 방수 기능도 있죠. 1층과 다른 느낌을 주기 위해 2층은 전부 볼론 바닥재를 시공했어요. 비닐 소재지만 패브릭이나 카펫을 깐 것처럼 포근해 보이거든요.” 안주인 육수경 씨는 물청소를 하는 것보다 더 깔끔하게 생활할 수 있고 청소도 쉬워서 바닥재에 만족한다는 말도 보탰다. 남매의 방은 원래 하나였지만 중간에 수납장 겸 벽을 세워 두 개로 분리했다. 방은 나눠져 있고 작은 테라스는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서로의 사생활은 존중하면서 가족이 모이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배려한 것. 그런 가치를 추구하는 이 가족에게 방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볕이 잘 드는 부부 침실. 침실에는 침대와 벽걸이 TV만을 단출하게 두었다.
잘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옆집의 감나무가 그림처럼 보이는 부부 침실도 심플하긴 마찬가지다. 침대와 벽걸이 TV만 둔 부부 침실에서 박경식 씨 부부의 삶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미팅을 할 때 남편분께서 책 몇 권을 소개해주시더군요. 집과 관련된 책들이었는데 핵심 메시지는 ‘비우며 살기’와 ‘단출한 삶’이었어요. 비우며 산다는 것이 실천하고 싶어도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빙고 하우스의 가족은 정말 그런 삶은 실천하고 있는 분들이었어요.” 사치나 허세와는 거리가 먼 이들 가족은 사용하던 식탁도 그대로 가져왔고, 나머지 갖고 있던 짐도 애초에 버리거나 기증할 목적으로 저렴한 것을 골랐다. 대부분의 조명과 가구 역시 경제적인 가격대의 이케아 제품이지만 조금의 옹색함도 없이 집 안에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소신 있는 선택이 보여주는 당당한 기운처럼. 처음 빙고 하우스를 사진으로 접했을 때는 일본 도쿄의 작은 주택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막상 다녀오니 생각이 달라진다. 다른 어떤 집과도 닮지 않은 그들만의 독특함이랄까. 빙고 하우스는 네 식구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작지만 넉넉한 보금자리다.
1 이케아의 벽 거울을 달아 공간이 널찍해 보인다. 2 부엌 겸 다이닝 공간. 조만간 식탁 옆에 작은 소파를 둘 계획이다. 3 비워내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빙고 하우스의 안주인 육수경 씨.
1 1층의 중심 공간인 세탁실. 작은 화장실이 달려 있고 각종 수납을 해결할 수 있는 만능 공간이다. 2 부부 침실과 연결되는 욕실. 바닥에는 볼론의 비닐 직조 바닥재를 깔았다.
세탁실 천장. 신용환 실장은 이 공간을 보고 집을 설계하기로 마음먹었다.
딸 아이의 방에서 본 테라스. 방은 나뉘어 있지만 테라스는 남매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