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식구들이 어울려 살지만 각자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집을 소개한다. 3대가 함께 지내는 이 집에서 가족들은 화목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낸다.
대가족이 모두 모이는 거실. 메인 전등 없이 무드 등과 보조 조명만으로 깔끔하게 꾸몄다. 천장에 달아 놓은 조명은 삼진조명, 커튼은 유앤어스, 목제 프레임으로 만든 1인용 의자는 막살토, 검은색 사이드 테이블은 까시나 제품이다.
즐거운 상상을 해보자. 만약 1등 복권에 당첨된다면 그 돈을 어떻게 쓰고 싶은가. 비슷한 질문을 하나 더 해보겠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집으로 이사한다면 공간을 어떻게 쓸 생각인가. 그저 상상일 뿐인데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두 가지 질문에 공통적으로 예상되는 점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데에 낭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흔히들 크고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바라던 대로 공간이 광활하다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불편을 느낄지도 모른다. 집은 때에 따라 휴식처, 식당, 세탁소, 도서관, 사무 공간 등 다양한 용도를 대신하기 때문에 적재적소로 공간을 나누는 것이 좋다. 좁으면 좁을수록, 넓으면 넓을수록 공간의 효율은 언제나 최적이어야 한다. 특히 식구가 많은 집이라면 공용 공간과 사적 공간을 잘 분리해야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유앤어스, 모노콜렉션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김정은 실장이 최근 완성한 곳은 ‘대가족을 위한 집’의 좋은 표본이 될 수 있다. 이 집은 방배동에 자리한 363㎡ 규모의 빌라로 부부와 성년이 된 아들과 딸 그리고 한 달에 한두 번 방문해 일주일간 머물다 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여섯 식구가 지내고 있다. 그래서 온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거실과 주방, 다이닝 등 공용 공간은 여유 있게 만들고 방은 콤팩트하게 구성했다. 대신 식구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방에 들어 갈 때 지나는 동선이 서로 겹치지 않는다거나 드레스룸과 욕실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아들 방에는 각종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도록 드레스룸을 넉넉하게 만들었고,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딸은 화장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방 안에 욕실과 파우더 공간을 따로 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는 침대와 긴 책상을 놓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부부 침실에는 두 개의 드레스룸이 있다. 침대가 놓인 벽 뒤에는 아내의 공간, 침실 옆에 있는 방은 남편의 것이다. 서로의 옷과 물건을 각각 보관하기 때문에 정리정돈 문제로 서로 눈치 볼 일이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머무는 게스트룸에는 드레스룸이 필요하지 않아 옷장을 두었다. 대신 반신욕을 좋아하는 할머니의 취향을 반영해 욕조를 새로 만들었다. 게스트룸은 손님용 화장실과 이어지는데, 기존에 방이었던 부분을 막는 대신 욕실로 확장했다. 욕조와 화장실은 중문으로 분리되어 잡다한 욕실 용품을 애써 정리하지 않아도 깔끔한 상태로 손님을 맞이할 수 있다. 또 책을 좋아하는 딸 방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에 TV를 설치해 각자의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식구가 많다 보니 살림살이의 규모도 상당하다. 그래서 옹벽을 제외한 벽을 모두 조금씩 조정해 수납공간을 최대한 확보했다. 부부 침실과 아들 방은 원래 복도로 이어지는데 가운데를 막고 각자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수납 창고를 만들었다. 벽처럼 보이는 곳은 대부분 이런 수납장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이 보기에는 잡다한 물건이라곤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깨끗하게 청소된 호텔의 객실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도 그럴것이 각종 물건으로 지저분해지기 쉬운 주방마저 메인 주방과 보조 주방으로 분리해 눈에 보이는 장소는 단정하게 정리하고, 생활용품은 안쪽에 숨겨놨기 때문이다.
김정은 실장은 인테리어를 상담할 때 집주인의 성품이나 성향을 먼저 보는 편이다. “가족들이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에요. 트렌디한 것보다는 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차분한 것을 좋아했죠. 한 사람씩 보면 고요하고 정적이지만, 식구들이 전부 모이면 시끌벅적하고 아주 화목해요. 그래서 집도 지나치게 개성이 강한 공간보다는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고, 어떤 사람들과 모이는가에 따라 분위기가 바뀌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녀가 설명했다. 전체 톤은 그레이와 오크로 차분하게 연출했지만 스틸, 우드, 도장, 타일, 유리 등 여러 소재를 적절히 사용해 시각적으로 지루하지 않게 꾸몄다. 그리고 장식은 최대한 절제 했는데 특히 벽면을 많이 비워둬 살면서 공간을 채워나갈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겼다. “빼곡하게 차 있는 공간은 답답한 느낌이 들어서 힘들고, 너무 창백한 공간은 다른 시도를 하기가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제 역할은 실제로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이 공간을 즐겁게 쓸 수 있도록 기초를 만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가족들은 이사해서 화가인 고모가 그린 유화와 남편이 수집한 동양화를 걸었다. 식구들은 각자 자신의 공간을 또 어떻게 꾸밀지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다. 대가족이 함께 살지만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담아낼 수 있는 이 집은 커다란 캔버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