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터전 삼아 일하던 두 명의 요리사가 제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애월읍 유수암리라는 작은 마을에 나란히 일식당과 이탤리언 레스토랑을 열었다.
제주 한담해안 산책로에 선 요리사 김승민과 강길수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 1>의 우승자로 알려진 김승민. 실은 서울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실력파 요리사로 이름을 떨쳤던 그다. 그런 김승민이 제주도로 삶을 터전을 옮겼고 일식집 ‘아루요’를 열었다. 제주도에 가면 꼭 가봐야 할 식당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적인 명소가 되었지만 요리사 김승민에겐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최상의 식재료가 지천에 깔린 제주가 김승민을 자극했다. 결국 매일 다른 식재료로 매일 다른 요리를 만드는, 프라이빗 일식당 ‘모리노 아루요’를 열었다. 그리고 여기 김승민을 똑 닮은 또 한 명의 요리사가 있다. 미국과 서울 유명 호텔의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실력을 쌓은 강길수. 호텔에서처럼 대량으로 공급 받는 대신 직접 가꾸고 재배한 식재료로 요리하고 싶어 ‘모리노 아루요’ 바로 옆에 이탤리언 레스토랑 ‘삐꼴라 쿠치나’를 열었다. 제주가 선물한 천혜의 식재료에 제주의 바람 한 숟갈, 바다내음 한 숟갈 그리고 이 둘이 빚어낸 땀으로 만들어지는 음식 이야기를 소개한다.
1 모리노 아루요의 정강어튀김 2 삐꼴라 쿠치나의 모둠 채소구이
매일 다른 요리를 만드는 일식 요리사, 김승민
‘숲 속의 아루요’를 뜻하는 일식당 ‘모리노 아루요’. 점심에 30개의 도시락을, 저녁에는 15인분의 코스 요리를 만든다. 모두 하루 전날 혹은 매일 꼭두새벽에 공수한 재료로 구상하고 요리를 한다. 그래서 ‘모리노 아루요’에는 메뉴판이 없다. “어떤 음식이 나올지 모른 채 저만 믿고 오는 손님을 실망시킬 수 없기에 매일이 도전이에요. 힘들지만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해산물과 고기류를 제외한 웬만한 채소와 향신채는 ‘모리노 아루요’ 바로 옆에 마련한 텃밭에서 얻는다. 얼핏 보기엔 수풀만 무성하니 과연 김승민의 말대로 시소, 오크라, 가지, 고추, 수수, 콩, 박하, 매실, 배, 앵두 등이 자라는 밭인가 의문이 든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영근 채소와 과일을 확인할 수 있는데 모두 그냥 유기농법도 아닌 자연순환 유기농법으로 기른 보물들이다. “늘 직접 가꾼 텃밭을 꿈꿔왔어요. 마침 제주에서 씨앗 도서관을 운영하고 자연순환 유기농법을 전파하는 김윤수에게 토종 씨앗을 받아 심었죠. 그의 가르침대로 밭을 갈거나 솎아내지 않고 비료도 주지 않아요. 자연이 지닌 생명력만으로 자란 것들이죠.” 사람의 손이 닿지 않고 저희들끼리 아등바등 경쟁하며 자란 수확물은 확연히 더 신선하고 더 맛있었다. 이런 식재료가 더욱 김승민을 자극했고 움직였다.
1 자연순환 유기농법으로 키우는 텃밭. 2 입구에 선 요리사 김승민과 아내이자 든든한 조력자 홍연주. 3 모리노 아루요를 찾은 김태웅 교수의 가족. 4 속까지 간이 고루 배인 대구살과 무조림. 5,6 제주에서 작업하는 가구 디자이너 이양선 작가와 김승민이 함께 만든 공간.
‘모리노 아루요’는 100% 예약제로 운영된다. 으레 식당이라 하면 많은 손님과 빠른 테이블 회전율을 지향하는 것이 당연지사.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김승민이 만든 ‘콩밥’을 보니 금세 수긍이 간다. 3일간 수시로 물을 갈아가며 비린 맛을 빼고 주름이 지지 않게 불린 콩을 다시 간장 양념장에 장장 9시간을 졸인다. 이러한 콩을 넣고 밥을 짓는데 알알이 살아 있는 콩의 식감과 달착지근한 맛에 반찬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금에 재워 하루 한 번씩 뒤적여 한 달 만에 완성한 배추 절임, 64℃에서 삶은 달걀의 노른자를 된장이나 간장에 일주일간 절인 달걀노른자 절임 등 모두 단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참 전부터 예약한 손님에겐 더욱 진귀한 음식을 내놓고 싶어요. 신선할 때 수확해 정성과 시간을 들인 음식을요. 그래서 예약제를 고수하고 있어요.” 이렇게 만든 밥과 반찬에 오랜 시간 양념을 끼얹어 만든 생선조림, 육즙이 풍부한 커틀릿 혹은 햄버그스테이크 등이 더해진다. 저녁 영업이 시작되고 이웃이자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서 연극 연출을 가르치는 김태웅 교수가 가족을 이끌고 왔다. 가깝다고 예외는 없다. 그 역시 예약을 한 손님이다. 어른을 위해서는 나토 콩밥, 대구조림, 생선튀김, 햄버그스테이크를 채운 한 상을, 이것저것 먹기보다는 한 그릇째 먹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다시마 국물의 우동과 감자 고로케를 준비했다. 이유 있는 고집이 채운 맛있는 밥상에 행복했던 제주의 어느 날이 저물었다. 다음 날 ‘모리노 아루요’의 주방은 다시 새벽같이 붉을 밝힐 것이다.
갓 구운 포르케타를 써는 요리사 강길수.
1 직접 깎아 만든 아일랜드 식탁과 프랑스에서 공수한 몰테니 가스레인지 오븐이 있는 주방. 2 해 질 녘이면 멋스런 자연 채광이 쏟아지는 삐꼴라 쿠치나. 3 이웃이자 웹툰 작가인 심형섭 부부와 지인을 위한 파티 상차림. 4 신혼 1년 차의 요리사 강길수와 소믈리에 신혜원. 5 유럽을 돌며 모은 빈티지 그릇과 액자.
재료가 곧 요리라는 이탤리언 요리사, 강길수
‘모리노 아루요’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삐꼴라 쿠치나’. 이탈리아어로 작은 부엌을 뜻한다. 작은 부엌에서부터 큰 가정이 시작한다는, 우리나라로 치면 가화만사성에 가까운 이탈리아의 고어이기도 하다. 직접 키운 재료로 만든 건강한 가정식을 표방하는 이탤리언 요리사 강길수와 소믈리에인 아내 이혜원이 함께 지은 이름이다. 요리를 만드는 남자와 와인 쫌 안다는 여자가 합심해서 만든 ‘삐꼴라 쿠치나’에 들어서면 탁 트인 개방형 주방과 빈티지풍으로 꾸민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강길수가 직접 제주산 삼나무를 이어 붙이고 깎아 만든 아일랜드 식탁, 제주도 전통 가옥에서 얻은 고재로 만든 그릇장과 와인장이 예사롭지 않다. 여기에 아내 이혜원이 네덜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에서 오래도록 모은 빈티지 아이템으로 채웠다. 오래된 그릇부터 닭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조명, 크고 작은 액자 등이 텅 빈 공간에 숨을 불어넣는다. 시간이 지나 빛바랜 물건들이 집과 같은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곳에서 강길수의 요리가 만들어진다. “고기와 해산물 외에 웬만한 건 직접 키워 요리해요. 도시에서 일할 때 가장 절실했던 게 바로 식재료였어요. 대고 쓰는 재료가 아닌 직접 길러 믿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요. 그래서 제주에 오자마자 농장과 텃밭을 만들고 하나 둘씩 채소와 허브를 심기 시작했어요.” 직접 기른 채소와 딜, 타임, 바질, 민트 등의 허브를 수확한다. 마당에 자란 푸성귀도 식재료가 된다. 제주도산 제철 식재료도 놓칠 수 없다. 제주산 문어는 화이트 와인, 레몬, 양파, 셀러리를 넣고 약한 불에서 4시간 동안 졸인다. 제주산 통삼겹살은 허브 소금을 발라 오븐에서 3시간 동안 구우면 이탈리아식 돼지구이인 포르케타가 된다. 생선은 물 한 방울 넣지 않고 채소가 가진 수분과 약간의 화이트 와인만으로 쪄서 진한 바다의 풍미가 일품이다. 텃밭에서 수확한 갖은 허브로 만든 스페인식 살사 베르데, 아르헨티나식 치미추리 등의 소스가 요리에 풍미를 더한다. 맛있는 음식은 식재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철학으로 만든 강길수의 요리는 어디 하는 튀는 구석이 없이 담백하고 신선하다. 매일 자라는 텃밭과 함께 강길수의 주방은 오늘도 바삐 돌아간다. 서울에 이어 가장 핫한 곳이 제주도라 할 정도로 요즘 제주는 뜨겁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찾고 더불어 많은 상업 공간이 생기고 있다. 서울을 떠나 제주로 내려간 요리사도 꽤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장사보다는 참된 요리사의 길을 걷고 있는 김승민과 강길수. 오래도록 이 둘의 요리를 맛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