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천과 석고붕대, 쓰다 남은 매니큐어 등 버려지는 것을 소재로 작업하는 이혜민 작가. 사소함에서 특별함으로, 조연에서 주연으로, 하찮은 것들을 관심과 애정으로 어루만져 예술 작품으로 치환시키는 그녀는 낮은 곳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힘이 있는 작가다.
이혜민 작가의 작업실. 레스토랑이 앞다투어 들어서고 온갖 명품 브랜드숍이 즐비한 삭막한 청담동 번화가에 위치하지만 작가에겐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다. 문을 여니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든 필로우 시리즈를 천장부터 설치한 풍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작업실에 조용히 앉아 조각조각의 천을 손수 꿰맬 때면 가슴속에 훈풍이 일었다. 천을 연결해 작은 베개 커버를 만들고 솜으로 속을 채워 켜켜이 쌓아 올리면 마치 오랜 시간 염원해왔던 꿈이 이루어지는 것만 같은 쾌감을 얻곤 했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이혜민 작가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다. 시댁에 들어가 살았고 집안 가풍을 익히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당시에는 개인 작업을 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전향할 것을 권유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혜민 작가는 작가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짬이 날 때면 누추하지만 혼자만의 공간에 찾아들어 작품을 구상하곤 했다.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버려지거나 낡은 천을 활용해 작은 베개를 만들어 새로운 설치 구조물을 완성하는 ‘필로우 시리즈’이다. 마음이 요동칠 때면 스스로를 다독이듯 담담하게 해온 작업인데 이 작은 작업이 미술계에 작가로서 뿌리를 내리는 견고한 발판이 될 줄은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1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패치워크 천으로 소파를 커버링하고 앤티크 가구로 채워놓은 작가의 작업실. 오래된 물건에서 발하는 특유의 안락함이 느껴진다. 2,3 석고붕대를 물에 적셔 모양을 잡고 굳히기를 수십 번 반복해야 탄생하는 이혜민 작가의 화이트 섀도 시리즈.
아들과 함께 뉴욕으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이혜민 작가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를 전공하며 예술을 주제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실험적이고 자유분방한 전시를 감상하기 시작하니 한동한 방치됐던 작가 이혜민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작업에 대한 열정이 넘쳐 이렇게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을 때 가까스로 떠난 유학길이었어요. 뉴욕에서 저를 돌아보고 자아를 찾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죠. 타지에서 남편 없이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이 버거웠지만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즐겁게 공부했습니다.” 뉴욕에서의 생활은 그녀에게 새로운 주제의 작업을 기획하고 색다른 소재를 발견하는 작가로서의 재정립의 시간을 선사했다. 낡고 오래된 것들을 워낙 좋아해 주말에는 벼룩시장을 돌며 앤티크 제품을 살펴보고 때로는 앤티크 경매에 참여하며 오래된 것들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시안 또한 키울 수 있었다. “쓸모를 잃어버려 버려지거나 방치되는 것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베개 작업에 오래된 천을 사용하는 이유가 쓸모를 잃어버린 것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 위함이죠. 하지만 어떤 것이든 물건의 생명력은 참 놀라운 것 같아요. 방치되어 있던 것이라도 애정과 사랑을 갖고 새로움을 불어넣으면 과거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죠. 그래서 저에겐 바느질하는 행위 자체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공존이라 할 수 있어요. 쓸모를 잃어버린 오래된 것에도 미래가 있다는 것을 작업을 통해 매번 느끼고 있습니다.”
뉴욕 생활은 이혜민 작가에게 작가로서의 다양한 기회를 열어주기 시작했다. 2001년 뉴욕의 워싱턴 스퀘어 갤러리에서 <버블>전을 개최했고, 다음 해에는 에이트 아트 코퍼레이션 갤러리에서 <필로우>전을 개최했다. 이 두 개의 전시는 작업 활동에 새로운 윤활유가 되어 사간갤러리, 브레인 팩토리, 갤러리엠 등 국내에서도 개인전을 가질 기회가 생겼고 미국에서는 보다 다양한 갤러리에서 전시를 개최하며 작가로서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다. 특히 지난해 뉴욕의 텐리 갤러리에서 개최한 <필로우 토크>전은 베개를 활용한 공간 설치 작업으로 평단의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올해 3월 아트 모라에서 개최한 <화이트 섀도>전 역시 좋은 평을 얻으며 미국의 유명 미술 잡지인 <스컬프처> 11월 호에 소개되는 값진 기회를 얻었다. “<화이트 섀도>전에서는 새로운 소재인 석고붕대를 사용한 작품을 대대적으로 선보였어요. 석고붕대는 처음에는 얇고 부드럽지만 물을 묻히면 단단해지는 물성이 있어요. 여러 차례 물을 묻혔다 굳혀가며 새로운 모양을 형성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혜민 작가에게 있어 얇고 부드러운 석고붕대를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은 작가 스스로가 연약함에서 강건함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작고 연약하게 태어나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결국에는 견고해져야 하는 우리 삶의 이치와 닮아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 석고붕대는 다친 곳을 치유하는 데 사용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이 치유되고 행복해지기 바란다. 2 작가는 오래된 액자 프레임을 이용해 조형물을 만들고 채색을 입혀 하나의 조각 작품 ‘패시지 passage’를 만들었다. 항상 조연인 액자의 프레임이 주연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3 집에서는 거실에 있는 나무 테이블에서 작업을 하곤 한다. 쓰다 남은 매니큐어로 작업하는 시드 Seed 시리즈를 작업 중이다.
이혜민 작가는 지난 10월 7일 한국국제아트페어 KIAF에 참여하며 한국에서의 활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내년 1월엔 엠갤러리에서 개인전을, 2월에는 아트스페이스 벤에서 페인팅 작가와 함께 2인전을 개최한다. 3월엔 홍콩 아트 바젤에 참여하며 6월에는 영은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그녀는 요즘 청담동의 작업실과 집을 오가며 열띤 작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청담동 번화가의 한 건물 4층에 위치한 이혜민 작가의 아담한 작업실은 그녀의 바쁜 마음만큼이나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다. 채광 좋은 창 너머로 지인들에게 받은 천들이 한가득 쌓여 있고 작업실 곳곳에는 석고붕대와 천 조각들, 실패 꾸러미, 각종 미술 도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회가 기회를 낳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해요. 제 작업에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기쁠 따름이에요. 어쩌면 저는 조금 돌아왔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뒤처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안 될 것 같으면서도 지금 이만큼 된 것처럼 앞으로 제 꿈을 펼칠 수 있는 날이 자연스럽게 찾아올 거라 믿습니다.” 오랜 여정을 거쳐 자신을 관찰하고 담금질해 스스로를 작가로 일으켜 세운 이혜민 작가. 이제 그녀에겐 새롭고 견고한 또 다른 시작이 다가오고 있다.
1 사방이 통창이라 도시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이혜민 작가의 집 거실. 뉴욕의 벼룩시장에서 틈틈이 구입한 다양한 디자인의 의자와 테이블, 앤티크 가구 등 각기 다른 스타일로 꾸몄지만 작가의 취향으로 빚어져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2 깔끔한 주방. 이곳에도 작가 취향의 빛바랜 라운지 체어가 놓여 있다.
1 작가의 필로우 시리즈와 뉴욕에서 구입한 200년 된 앤티크 체어, 서랍장으로 꾸며진 거실. 2 거실 한 켠에 설치해놓은 백남준의 작품. 작가에게 많은 영감을 선사한다. 3 작가가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든 작은 베개는 천을 어떻게 조합하고 빚어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의 작업으로 탄생한다.
1 작가가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든 작은 베개는 천을 어떻게 조합하고 빚어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의 작업으로 탄생한다. 2 이혜민 작가의 집에 들어서면 학창 시절에 만든 흉상과 필로우 시리즈, 패시지 시리즈와 앤티크 가구로 꾸민 아티스틱한 풍경을 마주하게된다. 정면에는 앤디 워홀의 판화 ‘마가렛 공주’가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