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디자인을 하는 건축가, 농사짓는 건축가로 종횡무진 활동하는 건축가 최시영. 텃밭 문화와 온실 건물을 통해 공간에 새로운 이야기를 불어넣고 있는 그가 일군 농장 파머스 대디의 오후 속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작업물이 생기면 언제나 소식을 알려왔던 그가 지난 3월, 경기도 광주에 있는 파머스 대디 Farmer’s Daddy 농장으로 초대했다. 몇 년 전부터 밭 디자인을 하는 건축가, 농사짓는 건축가로 수식어를 바꾼 그가 4년 동안 일구고 가꾼 농장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날의 미팅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되지 못했고 5월 초 농장을 찾아가는 길. 평소 주말이면 자동차로 북새통을 이루는 도로지만 운 좋게 시원스레 뚫린 길에 쾌감하며 농장에 도착했다. 동그랗고 작은 검은색 안경, 듬성듬성 나 있는 턱수염, 모노톤의 의상이 트레이드마크인 마른 체구의 최시영 소장은 몇 해 전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2000평의 땅을 일궈 만든 파머스 대디는 그린하우스, 은행나무 둘레길, 마켓, 매화꽃 열매길, 들꽃 정원, 퍼퓸 코타지로 나뉘는데 고수의 공간답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어느 하나 허투루 배치 된 것이 없다. 눈길을 끄는 건 뾰족 지붕의 온실인 그린하우스. 농사짓는 건축가로 이름을 바꿔준 매개체가 된 건물이다. 야트막한 경사길에 잘 가꿔진 농장을 산보하며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들려준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곳을 알렉스 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온실 카페로 생각하지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한국의 도시나 시골의 풍경을 바꿀 수 있는 착한 디자인이 배어 있는 곳이라는 것이 그가 말한 핵심 내용. 최시영 소장의 인생 2막의 시작을 알리는 바람마저 청량한 파머스 대디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터뷰의 망중한을 즐겼던 대화의 기록을 풀었다.
sns에서는 알렉스 더 커피를 건축한 아저씨라고 불리네요. 젊은 세대들이 제 과거 행적을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하죠. 지난 30년 동안 아파트나 주상복합 건물들을 디자인해왔어요. 당시 대부분의 건축가가 주택 인테리어 디자인 쪽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저는 주택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컸어요. 공간의 레이아웃과 컨셉트에 따라 집 안의 문화가 바뀐다고 생각한 거죠. 아파트 시장의 관습을 깬 첫 시도로 가족의 성격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패밀리룸을 탄생시키기도 했어요. 최근에는 알렉스 더 커피, 플랜테이션, 전경련 스카이팜을 디자인했습니다.
소장님을 뒤따랐던 테마가 ‘책’이었던 적도 있어요. 평택 북시티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집의 크기별로 평형대 대신 유명 작가들의 이름을 붙였고 커뮤니티 센터를 북카페로 만들었어요. 공간 내부에는 책꽂이를 넣을 수 있는 자리를 설계했고, 부엌과 주방의 파티션을 책장으로 변신시키기도 했죠. 결과적으로 책을 통해 자연스럽게 가족간의 스킨십을 유도한 디자인이었어요.
시대가 변하면 주거 공간의 환경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밭 디자인도 관련이 있나? 이는 국민소득과 관련이 있는데요. 1만 달러 시대에는 주거와 주변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고 소득 2만 달러 시대부터는 먹거리의 관심이 높아집니다. 3만 달러 시대부터는 힐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데 이런 문화의 시대적 흐름을 읽고 밭 디자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밭 디자인을 비롯해 농촌의 디자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일본 에츠코마리에서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트리엔날레에서 큰 영향을 받았어요. 젊은이가 한 명도 없이 노인들만 사는 산골 마을에서 대지 예술제가 열리는데, 일본의 어느 디자인 스튜디오가 만든 커뮤니티 센터가 인상적이었어요. 건물에서 로컬 농산물을 판매하고 농산물 박스도 디자인한 것을 봤어요. 그때 건축과 디자인이 사회에 이런 영향도 끼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밭 디자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텃밭에 꽃도 함께 심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구마, 딸기, 고추, 상추 등 농작물 옆에 꽃을 심는 거죠. 단순하게 보이지만 한국에는 이런 밭 디자인이 없어요. 뾰족 지붕 그린하우스는 어떻게 설계되었나요? 디자이너로서 새로운 개념의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싶어 철골 구조에 비닐을 덮어 만든 온실이에요. 형태도 예쁘고 지열 난방을 할 수 있는 형태로 한국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형의 비닐하우스 형태에서 벗어난 디자인이에요. 우리 농촌에도 접목시킬 수 있는 형태로 입소문을 탔는지 비닐하우스를 보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요.
농장을 계획하고 실현하기까지의 과정도 궁금합니다. 6~7년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어요. 그사이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 씨의 도움을 받아 영국 전역에 있는 유명하다는 농장과 밭을 수십 차례 방문했고 아이디어도 많이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본 아이디어로 농장에 수로를 만들고 펜스도 쳤어요.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곳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꽃 색깔이 어우러지도록 50여 가지의 꽃도 심었고요. 식물과 꽃 농사와 관련된 공부는 끝이 없어 지금도 열심히 배우는 중입니다.
밭에서 자라는 채소들이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네요. 자연 재배 농법의 대가로 불리는 송강일 박사의 책을 열독하고 여러 번 만나 인터뷰도 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무리 작은 텃밭을 가꾸더라도 실제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죠.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텃밭과 과실나무를 유기농법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소장님에게 파머스 대디는 어떤 의미인가요? 한국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도 흉내내지 못하는 슈퍼맨이죠. 저 역시 30여 년간 쉼 없이 일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농장의 테마인 ‘Feel the Breath of Nature’는 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살자는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과거에는 60살이면 은퇴해야 했지만 세상이 바뀌어서 이제는 오랫동안 일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곳은 다시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줄 뿐만 아니라 거의 피폐하기 직전의 제 정신세계를 살려준 곳이기도 합니다. 농장을 통해 각종 문화 행사나 아티스트 콜라보레이션, 대지 예술제 등 해보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새로운 개념의 농장 패션쇼도 진행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퍼퓸 코타지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나요? 유럽을 보면 가족이나 친척들이 대를 이어 운영하기 때문에 오랜 역사를 가진 농장이 많습니다. 둘째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 만들었는데, 순순히 따라와줄까 의문입니다(웃음). 그러다 보니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고민하게 되었고 향수를 생각해냈어요.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 냄새, 잔디를 깎으면 나는 냄새 등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의 향을 만들 겁니다. 이곳은 그런 향들을 경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에요.
요즘 텃밭 가꾸기나 식물 인테리어, 그린과 관련된 제품이 유행입니다. 단순히 유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것은 올 수밖에 없는 큰 물결입니다. 산업사회로 갈수록 도시는 점점 거대해지고 인간은 왜소해집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작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자연에 와서 이유 없이 기분이 좋은 이유도 이 때문이죠. 반려동물도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반려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고, 관련 직업군이나 디자인도 많아질 것입니다. 얼마 전 문을 연 호텔과 카페 농장이 있는 신개념의 납골당 에덴 파라다이스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