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구성하는 지역부터 꼭 알아야 할 스타 디자이너, 알고 가면 좋은 디자인 사조까지 처음 방문하는 이들이 꼭 알아야 할 기본 가이드를 소개한다. Step3는 바로 ‘트랜드 TRENDS‘. 시대마다 유행하는 디자인 사조, 즉 트렌드가 있다. 바우하우스부터 지금까지 디자인 업계 전반을 지배하는 20세기의 사조는 어떠한 경향으로 흘러왔을까.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의 윤여경 교수가 지금까지의 사조 흐름을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었다.
19세기, 수정궁과 아르누보
1850’ Industrial Revolution
파리의 에펠탑.
1851년 런던 하이드 파크에 기이한 건축물이 하나 들어섰다. 반짝거리는 이 건물은 수정궁 Crystal Palace이라 불렸다. 당시 건축가이자 조경 및 온실 설계자였던 조셉 팩스턴 경 Sir Joseph Paxton은 전통적인 건축 재료인 돌과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철과 유리만으로 수정궁을 세웠다.
18세기부터 산업혁명을 주도한 대영제국은 19세기 지구의 3분의 1을 지배했다. 산업혁명은 제2의 철강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인들은 철을 제련할 때 목탄 대신 코크스를 활용해 공정의 효율을 높였다. 철의 강도도 1000배 이상 올렸다. 덕분에 주로 칼이나 대포에 사용되던 철이 건축 소재로 거듭났다. 철은 건물만이 아니라 기차역, 다리, 배 등 강도가 필요한 건축에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프랑스의 건축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 Alexandre Gustave Eiffel도 철에서 영감을 얻어 철골 구조로 된 에펠탑을 세웠다. 프랑스의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에펠탑은 현재의 파리, 아니 프랑스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19세기의 파리 시민들은 에펠탑을 흉물로 여겼다.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한 예술 양식은 아르누보 Art Nouveau였기 때문이다. 아르누보를 직역하면 ‘새로운 예술’이다. 아르누보는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을 주도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영향을 받은 양식이다.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을 주장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꽃이나 나무 등 식물의 형태를 추상화시킨 장식을 선호했다. 귀족들의 상징이 주로 동물이었기에 유기적인 곡선을 강조한 식물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아르누보는 이런 흐름을 이어받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 양식이다.
1880’ Art Nouveau
(왼)벨기에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레의 작품, (오)윌리엄 모리스의 벽지
아르누보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 전반에도 영향을 주었다. 앙리 반 데 벨데 Henry van de Velde는 아르누보 양식을 잘 활용했던 벨기에 출신의 건축가다. 그는 건축뿐 아니라 의자와 시계 등 인테리어 소품도 아르누보 양식으로 디자인했다. 독일의 미술 공예 운동을 주도한 ‘독일공작연맹’에서도 활동하며 그랜드 듀칼 예술공예학교의 설립을 주도했다. 후일 이 학교는 바이마르 아카데미와 합쳐서 바우하우스로 거듭난다.
20세기 초, 바우하우스의 암 호른 주택
1910’ Bauhaus
바우하우스 건물.
1919년 바이마르에 설립된 바우하우스 Bauhaus는 가장 유명한 디자인 학교였다. 현대의 디자인 개념과 교육 내용이 대부분 바우하우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의 혁신을 주장한 유명 예술가들이 바우하우스의 교사로 참여하면서 새 시대의 예술가를 꿈꾸는 유럽의 젊은이들이 바우하우스로 몰려들었다. 초기의 바우하우스는 수공예 중심의 건축공예학교를 지향했지만 엄청난 기계의 발달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장이었던 그로피우스는 교육 방향을 수정하고 교수진을 교체해 신기술과 신소재를 적극 수용했다. 새로운 교수진은 소묘나 주관적 표현보다는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와 객관성을 강조했다. 기계를 활용해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예품을 만들도록 독려해 미술과 공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1923년 바우하우스는 자신들의 교육 이상을 알리기 위해 전시를 열었다. 건축학교를 표방한 만큼 새로운 주택도 선보였는데 이를 ‘암 호른 주택 Haus Am Horn’이라 부른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바우하우스의 교사들은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가 그랬듯 ‘건축은 거주를 위한 편리한 기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철과 콘크리트 등 기계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주방 인테리어가 혁신적이었다. 이 주방은 현대 주방의 모태가 된 ‘프랑크푸르트 주방(1926년)’에 영감을 주었다. 암 호른 주택은 현대인의 생활양식과 인테리어의 전범으로 평가 받았다. 하지만 바우하우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1933년 나치가 득세하면서 문을 닫았고 교사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20세기 중반, 미국과 소련의 아르데코
1920’ Art Deco
아르데코풍의 프랑스식 인테리어.
슬로베니아 가구 브랜드 리나 퍼니처의 문 라지 체어.
1925년 파리에서 ‘현대 장식미술 국제전’이 개최되었는데, 이 전시의 주제인 장식미술은 프랑스어로 ‘Art Deco’였다. 아르데코의 장식은 아르누보와 달리 자연적인 곡선이 아니라 반복되는 기하학적 직선이다. 재료 또한 목재보다 철과 유리가 주로 사용되었다. 직선적인 기하학 그리고 철과 판유리로 장식된 공간을 사람들은 아르데코 양식이라 불렀다. 아르데코는 소련에서 시작되었다. 구성주의 혹은 구축주의라 불린 혁명적인 예술가 그룹은 예술과 공예의 기계적 평등을 추구했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예품을 디자인했고 철과 콘크리트, 유리로 건물의 외부와 내부를 장식했다. 이 흐름은 앞서 언급한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향에도 영향을 주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상당수의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활약하고 있었다. 역사의 굴레에서 다소 자유로웠기에 건축양식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기능성을 추구한 건축은 이미 유럽보다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루스 Adolf Loos는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새로운 양식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후일 그는 ‘장식과 범죄’라는 에세이로 유럽에서 스타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했던 유일한 국가로 공장은 종일 가동되었고 노동자들한테는 기회가 넘쳐났다. 활기가 넘치는 미국이라는 도시에서는 전통의 굴레에 갇힌 유럽과 달리 실험적인 미술 양식도 적용 가능했다. 특히 미국 자본가들은 전통적인 귀족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효율성과 재생산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졌던 그들은 절제된 기하학적 장식을 선호해 건축의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에 아르데코 양식을 적극 적용했다. 덕분에 아르데코는 자본 귀족들의 양식이 되었으며, 지금도 미국의 고급 호텔과 백화점은 아르데코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20세기 후반, 미니멀리즘과 멤피스 운동
1960’ Minimalism
아키텍츠 601 심근영 소장의 판교 주택.
미국과 소련이 대립했던 냉전시대는 양극단의 시대로 디자인 양식도 단순과 유희, 양극단이 대립되었다. 평등을 추구하는 동유럽과 소련은 단순함을 강조했으며 자유를 추구하는 서유럽과 미국은 유희 문화가 도입되었다. 전통적인 문명, 문화적 경계는 무시되었고, 소련과 미국의 대기업은 자신들의 양식을 주변 국가에 강요했다. 그 강요는 미국과 소련의 국경을 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에는 단순함이 강조된 미니멀니즘 양식이 유행했다. 어린이에게 국경이나 문명의 경계가 없듯, 미니멀리즘의 공간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다. 재료의 순수성이 강조되며, 주로 무채색이 사용되었다. 기하학적 형태로 만들어진 공간과 가구는 각각의 기능이 완벽하고 조화롭게 배치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공간은 때로는 인간조차 거슬려 보이게 한다.
1970’ Memphis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의 메인 전시장.
많은 사람들은 이런 순수함에 숨이 막혔고, 이내 억압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멤피스 Memphis 운동이라 한다. 이탈리아의 멤피스 운동은 미니멀리즘에 대한 거부이자 기하학의 유희라 할 수 있다. 아르데코처럼 형태를 장식적 요소로 사용하고 무채색이 아니라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또한 목재나 천 등 다소 보수적인 소재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운동에 동조한 디자이너들은 의자와 책상, 조명 등 다양한 가구를 재치 있는 형태로 풀어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미니멀리즘으로 죽은 공간을 회생시켰다고 할까. 멤피스 운동을 보고 자신감을 얻은 각국의 디자이너들은 억압된 문명을 되살리고 자신들의 문화를 반영한 디자인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21세기, 기능주의
2019’ Contemporary
이케아.
무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의 유명한 명제다. 기능이 형태의 기준이며, 기능이 변화하면 형태도 변한다는 의미다. 설리번에게 영향을 받은 아돌프 루스가 장식을 범죄로 규정하자 형태도 위축되었다. 극도로 절제된 미니멀리즘은 형태를 기능에 가두었다. 억압된 만큼 반감도 컸고 멤피스 운동은 탈옥을 기도했다. 탈옥에 성공한 디자이너들에게 기능은 그저 재미와 즐거움이었다. 21세기 들어와 형태와 기능의 중용에 성공한 디자인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기업이 애플과 무지 그리고 이케아다. 이들의 디자인은 깔끔하게 마감되어 기능성을 강조했지만 내용은 다채로웠다. 애플의 다양한 앱은 디지털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고, 무지의 절제된 소품은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공간을 연출했다. 이케아는 자신들의 가구를 조합해 고객들에게 다양한 생활양식을 제안했다. 각각의 기업은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을 대표하지만 한 공간에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건축과 인테리어에 있어 문명의 경계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 디자인을 ‘기능주의 Functionalism’라고 말한다. 루이스 설리반의 이상이 한 세기를 건너 실현된 것이다. 2019년은 바우하우스 100주년이다. 대영박람회에서 철과 유리 소재로 촉발된 기능주의 건축은 100년 전 바우하우스에서 수용되어 교육되었다. 기능주의는 유년기의 아르데코와 청소년기의 미니멀리즘, 청년기의 멤피스를 거쳐 성숙되었고 이제 현실에 반영되고 있다. 이제 기능주의를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인정해도 될 법하다. 한 세기의 철학은 다음 세기에는 상식이 된다. 앞으로 기능주의는 디자이너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공유하는 미적 관점으로 성숙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디자이너들은 바우하우스에 진 빚을 갚은 셈이다. 빚을 갚으면 새로운 시도가 가능해질 것이다. 21세기는 어떤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