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또 흐린 대로. 기분 따라 골라 마시는 여름날의 술.
DOK X 메킷나이스
디오케이의 이규민 대표는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하고, 덴마크 코펜하겐의 브루스에서 근무했다. 참고로 브루스는 최근 덴마크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집시 브루어리인 투올 ToØl 소속의 브루펍으로, 투올은 다양한 부재료를 맥주에 접목해 새로운 술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굳이 그의 이력부터 끄집어낸 이유는 DOK의 막걸리가 그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DOK 역시 투올 스타일의 양조법인 드라이 호핑 기법을 사용해 맛과 향을 살리는 것이 특징이다. 차이점이라면 맥주가 아닌 막걸리를 주제로 한다는 점이랄까. 이게 무슨 막걸리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의 색다른 행보는 분명 막걸리 업계에 득이 될 것이라 믿는다. 지난달 새롭게 출시한 메킷나이스는 이름처럼 메킷나이스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출시한 막걸리다. 애플 사이다 비네거의 초산균을 이용해 산미를 내고 메킷나이스의 셰프들이 선택한 생강, 코리앤더 시드를 더해 은은한 향이 도는 것이 특징이다. 술이지만 마치 하나의 요리 같달까. 이규민 대표의 추천대로 시원하게 얼려둔 잔에 막걸리를 부은 뒤, 탄산수를 3분의 1쯤 부어 마시니 향이 더욱 살아났다. 새콤한 사워 계열의 막걸리답게 강렬한 한 방이 있었다. 입맛을 잃은 여름의 중턱에서 시원하게 한잔 들이켜기 그만이다.
그랑꼬또 청수
신선하고 상쾌한 화이트 와인 한잔이 간절할 때가 있다. 고민하다 그랑꼬또 청수를 한 병 샀다. 청수는 작년 말, 청계천에서 열린 한국 와인 페스티벌에서 맛본 화이트 와인으로 국내산 청포도인 청수 품종으로 만든 것이다. 산미와 당도의 밸런스가 좋아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다. 강하지는 않지만, 혀끝에 남는 은은한 타닌감이 음식과 곁들이기도 괜찮다. 한국 와인의 수준이 꽤나 올라갔다지만 괜찮은 것도 있고, 반면에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것들도 있다. 그랑꼬또는 그런 면에서 꽤나 탄탄한 와인이다.청수가 재배되는 경기 대부도는 일교차가 심하고,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과 뜨거운 열기, 습기 등 와인 양조용 포도를 재배하기에 천혜의 조건이라 한다. 워낙 쟁쟁한 지역에서 생산된 화이트 와인이 많지만, 가끔은 국내산 와인을 시도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싶다.
코발 드라이 진
낮에만 문을 열었던 발효 카페 큔이 ‘밤 큔’이라는 이름으로 술을 팔기 시작했다. 발효라는 레스토랑 컨셉트에 걸맞게 주류 리스트 역시 내추럴, 유기농 컨셉트로 구비했는데, 마음을 빼앗긴 것은 코발 드라이 진이다. 주니퍼 베리 특유의 향긋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돋보이는 코발 드라이 진은 그냥 여름 그 자체다. 코발은 외국의 힙스터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술이다. 진 외에도 위스키 등의 각종 리큐르를 생산하는데, 직접 농사 지은 유기농 원료를 사용해 정직한 술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1800년대 중반에 설립된 시카고 최초의 증류소이기도 한데, 켜켜이 쌓아온 수상 경력도 탄탄하다. 특히 코발 드라이 진은 2020 우먼스 와인 스피릿 어워드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고. 잘 만든 술을 건강한 안주와 먹고 있노라니, 아무리 마셔도 해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역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경성 과하주
작년 말부터 주세법 개정으로 전통주의 온라인 판매가 가능해졌다. 열악한 전통주 업계에서 판로를 넓혀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은 것이다. 법이 개정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술팜, 술담화, 술마켓, 술펀 같은 전통주 온라인숍이 문을 열었다. 들뜬 마음으로 온라인숍을 돌아다니다 경성 과하주를 발견했다. 과하주는 ‘여름을 지나는 술’을 뜻하며 술아원에서 고문헌을 참고해 작년 말 출시한 것이다. 다소 낯설기는 하지만, 여름에 술이 상하지 않도록 약주의 발효 중간에 도수 높은 소주를 넣은 우리나라의 주정 강화주다. 쉐리나 포트, 마데이라 같은 와인과 비슷한 계열로 볼 수 있는데, 심지어 포트와인보다 100년이나 빨리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름처럼 밀도 높고 끈적거리는 술을 털어 넣으니, 마치 바나나와 꿀을 가득 넣고 오물거리는 듯 달콤한 맛이 퍼져 나갔다. 도수는 주정 강화주답게 살짝 높은 20%다. 곱고 단아한 병을 부여잡고 한잔 기울이니, 버드나무 하늘대는 정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선비의 마음처럼 풍요롭고도 넉넉해졌다.
레돔 시드르
인사동 상생상회에 갔다 전통주 코너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레돔 시드르를 발견했다. 프랑스 알자스에서 양조를 공부한 프랑스인이 충주산 사과로 만든 것이라 했다. 물론 사과는 직접 키운 것이다. 참고로 시드르는 사과의 즙을 짜서 발효시킨 술이다. 포도를 재배하기 힘든 프랑스 북부나 영국에서 와인 대용으로 즐겼다. 달지 않고 쿰쿰한 게 내추럴 와인과 비슷한 결이다 싶었는데, 제조 과정을 듣고는 무릎을 탁 쳤다. “사과를 착즙한 뒤 껍질에 붙는 야생 효모를 사용해 겨울 동안 길게, 천천히 발효했어요. 마치 내추럴 와인처럼요. 별다른 안주 없이 차게 마시거나 돼지고기나 블루 치즈, 홍합 같은 조개류에 곁들이면 맛있어요.” 프랑스인 남편과 함께 레돔 시드르를 만드는 소설가 신이현이 설명했다. 플루트에 쪼르르 따르니 색깔도 로제 와인처럼 어여뻐 계속 잔을 치켜들며 색을 보았다. 도수는 낮술에 특화된 6%. 대낮부터 푸지게 마셔도 정신을 붙들 수 있다.
퐁당
여름 술을 떠올릴 때, 힙스터의 술인 내추럴 와인도 빼놓을 수는 없겠다. 청담동에 마실을 나갔다 내추럴 와인과 보이차를 함께 파는 내추럴 보이 정구현 대표에게 괜찮은 와인을 물었다. 그가 냉장고에서 꺼내온 것은 퐁당이라는 펫낫 스타일의 내추럴 와인이었다. “퐁당은 한국에서만 판매되는 한정판 와인으로, 내추럴 와인 수입사인 노랑방이 와이너리에 직접 부탁해 만든 거예요. 퐁당도 진짜 한국어의 퐁당이고요. 펫낫 스타일의 와인인데 밀맥주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기 좋아요.” 퐁당이라니. 이름부터 가히 여름의 술이다. 펫낫은 내추럴 와인에서만 볼 수 있는 스파클링의 일종으로, 특히 퐁당은 쇼비뇽 블랑 품종으로 만들어 상큼한 맛이 일품이었다. 홀로 집에 있던 금요일 밤, 비트감 있는 음악을 최대 볼륨으로 틀어놓고 달달달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앉아 한 병을 쭈욱 들이켰다.
덕덕구스 세션 IPA
여름 하면 맥주, 그중에서도 으뜸은 쌉싸름한 IPA가 아닐까. 인디언 페일 에일 Indian Pale Ale의 약자인 IPA는 19세기 식민지 시절, 영국에서 인도로 맥주를 운송하며 맛의 변질을 막기 위해 알코올 농도를 높이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의 양을 늘린 맥주를 의미한다. 유명한 것은 코끼리 맥주 인디카 IPA나 밸러스트 포인트 같은 것들이지만, 초심자라면 구스아일랜드의 세션 IPA를 추천한다. 세션 IPA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자들이 휴식시간(Session)에 마시던 낮은 도수의 IPA다. 홉의 강렬한 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도수는 5% 이하로 낮춰 낮맥으로 즐기기에도 부담이 없다. 덕덕구스는 모자익홉과 심코홉을 사용해 일반적인 IPA 대비 쓴맛을 떨어트리고, 홉의 풍미와 과일 향을 더했다. 역삼동에 위치한 구스 아일랜드 브루하우스 서울의 베스트셀러 레시피를 사용해 만들었다고. 덕덕구스는 2017년 하우스 맥주로 출시한 이래 세계 3대 맥주 품평회인 호주 세계 맥주 품평회, 인터내셔널비어컵 등에서 에일 맥주 부문에서 다수의 수상을 했지만, 그것을 떠나 일단 맛있다. 냉장고에 넉넉히 쟁여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