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하면 묵직한 가죽과 정제된 디자인만 떠올랐던 이들에게 <Species of Spaces> 전시는 짜릿한 신선함을 선사했다. 밝고 경쾌한 큐브로 둘러싸인 공간에 놓인 에르메스 홈 컬렉션은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 듯 즐거움 그 자체였다.
벽에 건 코트 행어는 에르메스의 첫 작업인 마구 제작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2017년 ‘리엥 데르메스 Lien d’hermes’ 컬렉션. 공작새, 열매, 양치류를 단조로운 색조와 스텐실 효과로 표현한 벽지는 ‘모자이크 숲의 주인 Maitres de la Foret Mosaique’. 사이드 테이블 위의 라운드 박스와 뒤에 보이는 팔각형 박스는 모두 ‘리엥 데르메스’ 컬렉션. 상판이 슬라이딩 형태로 열리는 2개의 사이드 테이블은 디자이너 필립 니그로가 2013년에 선보인 ‘레 네쎄쎄어 데르메스 Les Nécessaires d’Hermès’ 컬렉션. 에르메스 실크 스카프의 정사각형 비율에 맞춰 제작된 ‘까레 다씨제 Carres d’assise’는 커피 테이블 또는 의자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구부러진 나무 다리와 금속 프레임이 어우러진 ‘에키스 Equis’ 테이블과 심플한 디자인이 ‘에키스’ 체어. 테이블에 놓인 단순한 형태의 데스크 액세서리는 2018년 ‘플리 아쉬 Pli’h’ 컬렉션. 미니멀한 가죽 커팅과 새들 스티치로 마무리해 유연하면서도 견고하다.
에르메스 홈 컬렉션의 아티스틱 디렉터인 샬롯 마커스 펄맨 Charlotte Macaux Perelman과 알렉시스 파브리 Alexis Fabry가 연출한 <Species of Spaces> 전시는 기존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의 3층 공간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갖고 놀았던 단순한 형태의 큐브들이 거대한 크기로 확대돼 공간을 메우고, 나누었으며 각 큐브는 무거움을 벗어 던지고 파스텔 컬러를 입었다. 그 사이사이에 에르메스 홈 컬렉션의 가구부터 조명, 오브제와 텍스타일, 패브릭과 벽지, 테이블웨어 등이 보물찾기를 하듯 놓였다. 도자와 가죽, 나무, 종이, 캐시미어 등 다채로운 소재로 만든 제품은 기하학적으로 연출된 큐브 공간에서 각각의 개성을 잃지 않은 채 하나의 컬렉션처럼 어우러졌다. 컬러와 형태, 소재 그리고 건축까지 모든 것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즐거운 유희로 선보인 이번 전시는 10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됐지만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에르메스에 대한 엄격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벽과 큐브를 감싼 벽지는 ‘모자이크 숲의 주인’. 큐브 위에 놓인 트레이는 2018년 ‘페리메트르 Perimetre’ 컬렉션으로 손으로 직접 단면을 표현해 내추럴한 느낌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조명은 2014년에 선보인 미켈레 데 루키의 ‘팡토그라프 Pantographe’ 램프로 미니멀하면서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반원 큐브 아래 놓인 세라믹 소재의 다양한 꽃병과 트레이는 모두 ‘페리메트르’ 컬렉션. 뒤에 보이는 트롤리는 2017년 ‘에퀴빠주 데르메스 Equipages d’Hermes’ 컬렉션 중 ‘딜리정스 Diligence 오브제’로 옛날 마차를 떠올리게 한다. 가죽과 나무, 고리버들과 황동이 더해진 다양한 용도의 가구다. 트롤리에 놓인 테이블웨어는 2018년 ‘정원으로의 산책 A Walk in the Garden’ 컬렉션으로 아티스트 나이젤 피크가 디자인한 영국 정원 모티프의 패턴이 아름답다. 벽에 걸린 담요는 캐시미어 소재의 ‘타탄 Tartan’.
벽에 건 2018년 까마유 탕그램 Camails Tangram 프린트의 담요는 캐시미어와 실크 소재로 제작한 것으로 중국 전통 놀이인 칠요에서 영감을 얻은 무늬가 그려져 있다. 벽에 바른 하늘색 벽지는 ‘스퀘어 Square’. 100점 이상의 주얼리를 보관할 수 있는 특별한 캐비닛 ‘큐리오시테 아 비쥬 Curiosite a Bijoux’는 가운데 부분에 거울 겸 목걸이를 수납할 수 있는 비밀 공간이 숨어 있다.
단순한 도형과 컬러가 동양적인 느낌을 주는 담요는 이슬기 작가가 2017년에 선보인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Le Tigre Qui Fume’. 한국 전통 이불을 속담과 연관 지어 재해석한 것으로 누비 기술로 제작했다. 옆에 놓인 3개의 스툴은 ‘에퀴빠주 데르메스’ 컬렉션으로 내부에 감각적인 가죽이 특징이며 스툴 혹은 수납함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가죽 데스크 액세서리는 2018년 ‘플리 아쉬’ 컬렉션. 팔각형과 라운드 형태의 박스는 모두 ‘리엥 데르메스’ 컬렉션. 대나무 소재의 삼각형 ‘카루미 Karumi’ 스툴은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디자인한 것으로 일본 장인이 가벼운 대나무 소재에 탄소섬유를 더해 작업했다.
INTERVIEW
에르메스 홈 컬렉션 아티스틱 디렉터 샬롯 마커스 펄맨
ⒸShi-Ting Huang, Hermès 2018
이번 전시는 어떻게 기획되었나? 내게 중요했던 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미지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에르메스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피에르 알렉시 뒤마 Pierre-Alexis Dumas(총괄 아티스틱 디렉터)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에르메스의 정체성은 켈리백에 가까운가? 아니면 화려한 스카프인가?” 그러자 그는 둘 다라고 대답했다. 에르메스는 다양한 모습을 지니는 동시에 다양한 가치를 공유한다. 때로는 엄격하고 꼼꼼한 느낌을 주고, 어떤 것은 화려하고 환상적이다. 홈 컬렉션의 경우 가구에는 엄격성이 강조되고, 패브릭에는 판타지를 불어넣는 편이다. 올해는 색상과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 건축적인 접근 방법을 접목했다. 또 기존과 다른 신선한 느낌을 선사하기 위해 파스텔 톤의 색상, 밝은 컬러를 많이 사용했다. 에르메스 하면 가죽에 대한 이미지가 강한데, 그로 인해 가려졌던 신선하고 경쾌한 느낌을 소개하고 싶었다.
‘Species’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궁금하다. 이번 전시는 게임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공간과, 제품 간의 구획을 큐브를 사용해 구분했다. 기하학적인 3차원 공간에 에르메스의 홈 컬렉션 제품이 공존하는 것이 핵심이다. 전부 다르지만 한데 모아두면 조화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종’이라는 표현을 썼다. 생물을 구분 짓는 종의 개념은 아니다(웃음). 에르메스의 다채로움을 표현한 단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영감을 얻은 ‘게임’은 어떤 것인가? 어린 시절 즐겨 했던 놀이, 장난감을 갖고 놀았던 추억을 큐브를 통해 표현했다. 아주 단순한 기하학적인 모양이지만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을 법한 형태이기도 하다. 이런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큐브가 에르메스의 홈 컬렉션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보고 싶었다. 거실이나 특정 공간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전시 연출을 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제품 간의 관계나 특징이 더욱 두드러졌다.
시노그래피에서 사용된 색상은 직접 만든 것인가? 이미 에르메스 컬렉션에서 볼 수 있었던 색상인데 각각 더 밝게 구현했다. 시노그래피와 제품이 대비되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같은 색을 좀 더 연하게 사용했다. 예를 들어, 녹색은 이슬기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녹색의 채도를 낮췄고, 에르메스 레드 컬러도 연하게 만들었다. 보통 장난감 큐브들은 원색의 강렬한 컬러를 띠는 것이 많아 이를 탈피하기 위해 더 연하고 신선한 느낌을 강조했다.
건축학과 출신으로 에르메스와 건축이 유사성이 있다면? 시간과의 관계. 에르메스는 특히 시대성을 중시하는데 전통 유산과의 관계와 영향에 대해 늘 고민한다. 건축 역시 그 나라의 전통, 지리적인 특성, 역사 등을 살려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하나의 제품이 세대를 걸쳐 오랫동안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알렉시스와 나는 라파엘 모네오, 알바로 시자와 같은 건축가들과 협력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간에 대한 개념을 공유하니까.
2014년부터 에르메스 홈 컬렉션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에르메스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경험인가? 먼저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 또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엄청난 자유를 누리며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고, 브랜드에서도 모든 프로젝트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고 있다. 에르메스에서 일하기 전에는 이 정도로 정성을 쏟는지 몰랐다. 팀워크도 좋아서 건축가, 디자이너, 장인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때로는 그들에게서 창조적인 해법을 얻기도 한다.
올해 밀라노에서 선보인 에르메스 홈 전시에서는 사람들이 신체를 활용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젊고 감각적이며 즐거웠다. 이 또한 홈 컬렉션의 새로운 모습인가? 물론이다. 그 역시 공간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사람들이 공간에서 구르고, 몸으로 탑을 쌓기도 하는 등 보디 랭귀지를 통해 공간과의 관계를 표현했다. 우아하고 격식 있는 에르메스의 이미지를 잠시 잊고 즐겁게 게임하는 기분, 색조의 풍부함을 만끽하길 바랐다. 에르메스 홈 컬렉션에는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제품이 꽤 다양하게 있으니 말이다.
에르메스 홈 컬렉션의 키워드를 정의한다면? 엄격함, 판타지, 가죽, 텍스타일, 내추럴한 소가죽, 컬러, 이중성, 균형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공존. 부드러움, 단단함, 그 둘의 조화로움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관객이 특별히 눈여겨봤으면 하는 부분이 있나? 우리 팀원들에게 작은 가죽 조각을 주고 3차원 물건을 만들어보라는 워크숍 프로그램이 있었다. 접기와 바느질로 만든 가죽 트레이 같은 제품이 탄생했고, ‘플리 아쉬 Pli’H(플리는 불어로 ‘접은’, 아쉬는 H를 의미한다)’라는 컬렉션이 탄생했다. 심플해 보이지만 단계별로 다양한 기술이 적용된 트레이다. 이런 디테일이 에르메스 작업의 핵심이다. 작은 물건이지만 가죽공예와 관련된 모든 노하우가 집약돼 있다.
리빙 분야의 트렌드를 이야기한다면? 기술의 발전으로 오히려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조금은 전통적이고 가족적이며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편안함을 주는 디테일에 집중하게 되고, 전통 유산의 개념이나 근본적인 가치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 큰 흐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