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재로 승부를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집을 찾았다. 그렇다고 아주 특별한 재료를 쓴 것도 아니다. 타일과 무늬목, 벽지처럼 흔한 재료를 약간 다르게 사용했을 뿐이다. 여기에 몇 가지 컬러를 곁들이니 색채감이 확 살아났다.
벽의 일부처럼 보이는 미닫이문을 열면 거실에서 부부 침실, 드레스룸으로 이어진다. 벽에 걸어 놓은 노란색 그림은 이탈리아 작가의 작품으로 성경의 구절을 악보처럼 표현한 것이다.
보랏빛 장식 커튼 등 오묘한 색으로 공간을 꾸민 부부 침실. 라운지 의자는 몰테니앤씨, CD 플레이어와 스피커는 뱅앤올룹슨 제품이다.
모노톤과 낮은 조도로 차분하게 연출한 긴 복도를 따라 들어갔더니 현관 끝에서 막다른 동굴에 와 있는 듯한 신기루를 보았다. 바닥과 벽이 모두 돌 무늬로 된 이 집이 아파트라는 걸 잊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아무 장치 없이 마감재 하나만으로 이런 효과를 낸 주인공은 817 디자인스페이스의 임규범 대표다. “이건 포슬린 타일이에요. 러프한 질감을 살린 자기질 타일인데 표면 강도가 높고 내구성이 뛰어나 실내 마감재로 적합하죠.” 레노베이션을 의뢰한 김재형, 김은순 씨 부부는 한강이 바라보이는 이 집을 호텔이나 클럽 하우스처럼 만들고 싶어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임규범 대표는 포슬린 타일을 과감하게 사용해 자연의 질감을 집 안에 적극 끌어들이는 것으로 집주인 내외의 바람을 실현시켰다. 사실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는 천연 대리석이 적격이지만 아름다운 만큼 관리가 어렵고 값이 비싸서 일반 집의 마감재로 선뜻 고르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 포슬린 타일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타일 사이즈가 가로, 세로가 각각 600cm 정도인데 그걸로 시공하면 라인이 많이 생겨서 지저분해 보이거든요. 그래서 가로와 세로가 750c m, 1500cm인 타일을 썼어요. 일반 타일보다 훨씬 사이즈가 크기 때문에 돌판처럼 보이는 거죠.” 이 집은 익숙한 스케일감에서 벗어나면 완전히 달라 보인다는 시각적 규칙을 증명해냈다.
거실 벽에는 흰색 슬라이딩 문 뒤로 수납장이 숨겨져 있다. 회색 소파는 몰테니앤씨 제품. 금속 시계는 817 디자인스페이스에서 제작했다.
거친 돌의 질감을 재현한 포슬린 타일을 벽과 바닥에 시공해 압도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보라색이 도는 짙은 벽지로 포인트를 준 부부 침실.
거대한 포슬린 타일 벽과 바닥은 현관 입구에서부터 주방과 거실까지 이어진다. “저희 부부도 정말 만족해요. 표면이 너무 거친 타일은 슬리퍼를 신지 않으면 양말에 구멍이 나기도 하는데, 이 타일은 질감이 적당해서 맨발로 다녀도 괜찮을 만큼 촉감이 좋아요. 또 닦을수록 윤이 나죠.” 김재형 씨가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만 살았던 이촌동 토박이로 1년 전, 같은 아파트에서 동만 바꿔서 이사를 왔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아이가 자라면서 함께 늘어난 살림살이를 감당하기 위해 65평에서 82평으로 옮겼다. 줄곧 고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깨끗한 집만 골라서 이사를 다녔는데 이 아파트는 연식이 14년이나 되기도 했고, 가족들이 모두 만족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레노베이션을 결심했다. “화이트 인테리어는 가볍고 평범해서 싫었고, 예전 집이 클래식한 스타일이어서 이번에는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으로 하고 싶었어요. 실은 817 디자인스페이스에서 상담을 받기 전에 가구를 먼저 주문해서 가구에 맞춰서 인테리어를 해야 했죠. 아니었으면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가 되었을지도 몰라요(웃음).” 안주인인 김은순 씨가 겸연쩍게 털어놓았지만 덕분에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안목과 집주인의 취향이 균형을 이루는 집이 될 수 있었다.
단란해 보이는 김은순 씨와 두 딸.
핑크색을 좋아하는 작은아이의 취향을 반영한 방.
민트 컬러로 화사하게 꾸민 큰아이 방.
다이닝 공간에 놓인 리네로제의 원목 식탁에 맞춰 주방도 우드 톤으로 꾸며졌다. 어두운 월넛도 밝은 오크도 아닌 특이한 색감의 나무였다. “훈증 무늬목을 썼어요. 숯에 구워서 색을 뽑아내는 거라 나무가 변색되는 정도에 따라 다양하고 풍부한 색이 나와요. 나무 특유의 무늬가 더욱 살아나는데, 염색한 제품과 다르게 색상이 인위적이지 않고 고급스럽죠. 또 원목을 주방에 잘못 사용하면 뒤틀릴 수 있어서 원목에 가까운 품질의 무늬목을 선택했습니다.” 임규범 대표가 설명했다. 웜 톤인 주방과 민트와 핑크로 꾸민 두 딸아이의 방을 제외하고 이 집의 공간은 대부분 쿨 그레이다. 중간 톤의 회색이 풍부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컬러감 있는 소품들이 감초 역할을 한다. 특히 채도 높은 색의 회화 작품이 시야에 더욱 선명하게 들어온다. 무채색의 배경에 정점을 찍어낸다.
훈증 무늬목으로 고급스럽게 연출한 주방.
거실과 이어지는 주방. 식탁과 의자는 리네로제, 조명은 디에디트 제품이다. 벽에 걸어놓은 화려한 색감의 판화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다.
방에는 색을 과감하게 사용해 공용 공간인 거실과 분위기를 달리했다. 몰테니앤씨에서 구입한 회색 침대를 놓은 부부 침실에는 한쪽 벽에 진한 보랏빛이 오묘하게 감도는 벽지를 발라 포인트를 주고 그에 맞춰 보라색의 장식 커튼을 달았다. 침실은 이 색 하나로 비범해 보였다. 자칫 잘못하면 촌스러워 보여 기피하는 보라색을 용감하게 선택했고 보란 듯이 세련되게 공간에 녹여냈기 때문이다. 구조 변경에 한계가 있는 아파트의 경우, 여느 집과 다르게 보이려면 마감재에 공을 들이는 것이 방법이다. 같은 가구를 놓아도 배경에 따라 다른 인상을 주는데, 그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게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역할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집은 단순히 멋진 게 아니라 인테리어가 잘된 사례라고 말하고 싶다.
부부가 사용하는 드레스룸은 필라테스 운동실을 겸하고 있다.
남편 김재형 씨의 공간인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