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꾸리는 일이란 결국 온전히 자신을 이해해나가는 과정과 뜻을 함께 하는 것이지 않을까. 집 안 분위기를 좌우하는 벽의 색, 직접 발에 닿는 바닥재 등 사소한 것 하나 하나에서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매일의 생활 루틴과 취향 그리고 확고한 기준이 정확히 배어 있어야 하니 말이다. 이를 자칫 간과했다가는 나를 위한 집이 아닌, 집에 맞춰진 내가 돼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많은 이들의 공간을 구현하는 디자이너라면 피부에 스민 듯 이에 대한 중요성이 자연히 몸에 익을 수밖에 없다. 20여 년간 디자이너로 활동해온 비 디자인 랩 B Design LAB의 백길현 소장은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고 있다. 1950~60년대 이탈리아 영화와 그 시절에 유행했던 미드센트리풍의 디자인을 좋아했던 그와 아내는 몇 년 전, 정자동에 위치한 198㎡대 주상 복합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누군가가 아닌 오로지 자신들을 위한 집을 꾸리기로 결심했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클라이언트의 니즈와 취향을 파악하고, 그것에 맞춰진 공간을 만들어왔잖아요. 저희 집만큼은 오로지 나와 가족이 원하는 것으로만 가득 채우고 싶었어요. 아내와 아이가 저를 믿어주기도 했죠. 제가 둘의 스타일을 아는 만큼, 그들도 저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백길현 소장이 새로운 집을 구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부부가 함께 떠났던 프랑스 남부로의 여행이었다.
“여행지에 가면 익숙한 것도 새롭게 느껴지잖아요. 길거리를 지나던 사람이 입었던 나풀거리는 노란 원피스를 본 적이 있는데,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그 원피스나 도시의 색감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그때 머릿속에 남아 있던 추억의 조각을 이곳에 입혀보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죠.” 추억의 흔적은 다이닝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옐로 컬러로 마감한 데다 옆으로 난 창의 햇빛과 식물이 함께 어우러지니 따스함이 감도는 공간이 완성되었다. 이곳에 함께 놓인 대리석 상판의 테이블과 아일랜드는 백길현 소장이 직접 제작했는데, 흔히 상판용으로 쓰이는 소재가 아니지만 금을 연상시키는 크랙이 마음에 들어서 이를 활용해 두 개의 가구를 제작했던 것이다. 그 옆에 마련된 주방은 아내의 취향이 십분 드러난다. 이사할 당시만 해도 오래전에 지어진 아파트라 주방이 협소한 것이 내내 신경 쓰였지만, 세라믹 공방을 운영하는 아내의 취향이 오롯이 반영돼 지금까지 모으거나 직접 제작한 테이블 웨어가 진열장과 싱크대 주변의 선반을 가득 메우고 있어 한층 아이코닉하다. 싱크대 하부장 역시 백길현 소장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주방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바로 아치형으로 난 입구다. 아치를 구현하기 위해 그는 기존의 벽에 별도로 두꺼운 가벽을 입힐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완성한 클래식한 입구는 거실과 주방을 명확히 분리하는 역할은 물론, 다이닝 테이블에 앉아 입구를 바라볼 때 아치의 내부가 그림처럼 보일 수 있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아치 사이로 보이는 거실의 앤티크한 블루 컬러 수납함과 드레스룸으로 난 복도의 딥 그린 컬러가 주방의 옐로와 묘한 합을 이루도록 의도했기 때문. 시공 과정을 거치면서 수차례 머릿속에 그려볼 만큼 색의 조화에 정성을 쏟았던 결과물이다. 덕분에 식사하는 시간이 꽤 늘어날 만큼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백길현 소장이 덧붙였다. 아치를 통해서도 일부 짐작할 수 있듯 보다 다양한 컬러가 자리한 거실은 커다란 창을 통해 넓게 들어오는 채광과 시원한 개방감이 돋보인다. 이 같은 인상은 구조 변경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별도의 구조 변경을 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거실과 복도를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중문은 철거했는데, 그 결과 한층 유기적인 구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TV가 걸려 있는 우드 톤의 템바 보드를 복도까지 길게 이어지도록 설치해 거실이 연결된 듯한 인상을 강하게 전달한다. “집을 보면 호불호가 갈릴 만한 요소가 상당히 많아요. 색상이라든지, 복도까지 길게 난 템바 보드 그리고 드레스룸과 현관 입구, 심지어 주방에 만든 아치 같은 것들이요. 사실, 동료들은 말리기도 했어요. 보통 집에 적용하는 요소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잖아요. 누군가의 취향을 떠나 이 집에 사는 사람이 최고로 만족할 수 있다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일탈이라면 일탈이랄까요?(웃음)”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전 집에서는 제대로 어우러지지 못했던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가구나 소품이 신기할 만큼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는 부부는 현재의 일상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살다 보면 집에 대한 자잘한 불만이나 개선점이 보이기 마련일 테지만, 집에 대한 부부의 애정이 각별했다. 우스갯소리로 아이 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 이 집이라고 표현할 만큼. “아내와 함께했던 추억의 흔적, 한없이 어리게만 보였던 자식이 더더욱 커가는 모습, 가족 모두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게 살아갈 미래의 순간까지 우리가 사랑하는 이 집에 모두 자리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그저 시간을 계속 담아내고 있는 중이죠.”